임진왜란(선조 25년,1592년)은 조선이 세워진 이래 최대의 전쟁이었다. 7년 여에 걸친 왜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크게 고통을 겪었다. "어린 아이가 죽은 어머니에게로 기어가서 가슴을 헤치고 그 젖을 빨고 있었다."는 가슴 아픈 역사의 기록은 단지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침략자들의 총칼 앞에 침착하게 대비하여야 할,그리고 당당하게 맞서야 할 우리의 의무를 일깨우고 있다.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의 원인

  왜란 직전 일본은 1백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분열이 수습되어 통일된 국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그러나 내전 중에 형성된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무사계급:사무라이)이 통일 일본의 정치적 안정에 장애가 되었다. 이같은 일본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도요토미가 선택한 것은 대외 침략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하여, 제후들의 무력을 방출하고 아울러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이루려 하였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또 하나의 강력한 동기는 자신의 정복욕에 있었다. "명을 정벌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정명가도:征明假道)"는 일본의 요구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터무니없는 명분이었다. '뒷집에 가기 위해 너희 집을 지나가야겠다'고 요구하는 자에게 대문을 열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요토미가 명나라를 칠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요토미의 침략적 발상은 이미 중국대륙까지 넘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사신을 보내지 않는 것은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징후

  일본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명나라 다음 가는 강국인 조선에 대해 약자의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통일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우리 사신은 늘 조선에 가는데도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 같은 도요토미의 말은 그와 같은 태도 변화의 시작이었다.

 변화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조선 정부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일행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물론 여기에는 동인인 김성일과 서인인 황윤길이라는 양자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이 "만일 병화(兵禍:전쟁)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고 묻자, 부사 김성일은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정사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부사 김성일이 성급한 전쟁설로 인한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오히려 일본 쪽에서 흘러나왔다. 선위사 오억령이 일본 국왕사 겐소 등을 접촉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곧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조선 정부에 알렸으나 그는 도리어 파직당하였다. 또한 부사 소오는 부산포에 들어와서 "도요토미가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에 알리고 이를 평화롭게 수습해야 한다"고 거듭 간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다. 소오는 쓰시마 출신이었다.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이중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쓰시마는 양국간의 교역을 중개하여 번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쓰시마 도주로서는 되도록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쓰시마 도주가 일찍이 조선에 조총을 상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 건국이래 남해안에서 왜인들이 난(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을 일으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난들은 물자 교역의 제한에 불만을 품은 국지적인 난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일본이 전면전을 감행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가 전쟁의 가능성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때는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비게 되면서부터였다. 이 때부터 성을 수축하는 등 뒤늦은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신입은 실로 책략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군의 상륙과 북상

  1592년 4월14일, 왜군의 대선단이 이동하여 부산에 상륙하였다. 일본이 동원한 병력은 출동병력 20여 만, 후방병력 10여 만, 모두 30여 만의 병력이었다. 고니시의 제 1대가 상륙하자 부산진에서 첨사 정발이 막았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이어 동래가 함락되고 개전 초기 조선군의 육지전은 패전의 연속이었다.

 조선 정부가 희망을 걸었던 유일한 장수는 신입이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날렸던 맹장이었다. 그러나 신입은 지략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신입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새재(鳥嶺:문경새재)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을 것을 건의했으나 신입은 자신의 용맹을 과신한 나머지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4월27일 신입은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 앞의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문자 그대로 '배수(背水)의 진'을 친 것이다. 그곳은 왼쪽과 오른쪽에 논이 있고 물풀이 뒤섞여서 말을 달리기조차 불편한 곳이었다. 왜군들은 한 패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패는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왜군 조총부대의 삼교대 밀집사격(3열 횡대로 서서 교대로 사격, 화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으로 신입의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다. 신입과 군사들은 거의 모두가 강으로 뛰어들어 빠져 죽었고 그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 훗날 명의 장수 이여송은 왜군을 추격하여 새재를 지나면서, "이와 같이 험준한 요새지가 있는데도 지킬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신입은 실로 책략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4월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수도 한양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유도대장 이양원, 도원수 김명원으로 하여금 한양을 방어토록 하고 평양으로 피난을 하였다. 조선군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적 항전을 펼쳤으나 5월 2일 왜군 상륙 20일만에 한양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임진강 저지선마저 무너지자 조선 정부는 의주로 피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어 6월에는 평양마저 함락되어 일본의 조선 침공 40여 일만에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육지전에서의 패전 이유

 이렇듯 개전 초기에 조선 육군이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왜가 침공하랴'는 조선 정부의 안이한 정세 분석과 제도, 전술 상의 문제점이 육군의 패배 원인이었다.

 당시에는 농민들로부터 군포를 거두어 군사비로 사용하게 되어 있었는데 국가 정치 기강의 해이해져 군포 수입이 엉뚱한 데 사용되기 일쑤였다. 이는 곧 전반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전술상의 문제점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적의 침공시 식량과 무기를 성안으로 옮겨(급하면 태우거나 강물에 매몰시킨다) 적의 보급원을 차단하는 청야작전(淸野作戰)과 성에 들어가서는 주로 화살을 쏘아 적을 격퇴하는 수성전(守城戰)을 장기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왜군은 칼과 창을 가지고 돌격을 감행하는 근접전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개전 초기의 분수령이 되었던 신입의 탄금대 전투는 오히려 왜군의 장기를 살려준 전술적 오류의 전형이었다.


물에서는 이순신, 뭍에서는 곽재우
-수군과 의병의 활약

  6월 고니시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가토군은 함경도로, 구로다군은 황해도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명의 원군 파견이 이루어진 12월까지 무려 6개월에 걸친 기간동안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군의 전략은 육군이 북상하는 가운데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물자를 약탈하면서 전진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왜군의 전략이 조선 수군에 의해 좌절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좌.우수영의 2개의 수군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왜란 발발 직후 경상수영의 원균과 박홍 함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전쟁 전부터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착실하게 힘을 비축해왔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가 조선 수군의 주력이 되었다.

 왜군이 상륙한지 한 달여 만인 5월 초에 이순신 함대는 최초로 출동하였다.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37척을 파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측의 피해가 경상자 1명에 불과했다는 경이적 승리의 기록이었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옥포 승전 직후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옥포에서 왜병을 격파한 장계)'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 최초의 감격적인 승리를 전하고 있다. 옥포 해전의 승리는 조선 군사들에게 왜군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월초 이순신 함대의 2차 출동부터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가 가담하였다. 사천 해전에서 돌격선인 거북선이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연이은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파괴하는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왜군의 승보에 제동이 걸렸다. 대노한 도요토미는 서해안을 돌파하라는 지상명령을 내리게 되고 일본은 본국에 남아있던 왜선을 총동원하여 견내량에 결집시켰다. 이에 7월초 이순신 함대는 3차 출동을 하여 견내량에 정박 중인 일본의 대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선보인 학익진(학의 날개 모양의 전선 포진법)은 화력으로 결판을 내는 이순신 해전법의 백미였다. 이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 수군은 층각선(일본군 지휘관이 타는 높은 배)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는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8월초에는 안골포에 정박중인 선단을 공격하여 왜선 100척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서해 진입을 완전히 차단하였다. 8월 말 이순신 함대는 4차 출동을 감행하여 왜선 470여 척이 정박하고 있는 일본 수군의 본거지 부산포 내항으로 쳐들어갔다. 이후 왜군이 해전을 기피하고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시키는 기현상이 벌어졌으니 땅에서의 연패와 물에서의 연승이 명암처럼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수군이 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역량과 전략전술, 전선의 견고성, 화력의 우세함에서 찾을 수 있다.

 육지에서는 관군이 연패하고 있었다. 관군이 패주하는 반면, 육상 전투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의병의 활약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의 후방을 흔들었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이정암 등의 맹활약으로 왜군의 육상작전도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경남 의령지방의 곽재우였다. 백마를 탄 붉은 옷의 의병장으로 유명한 그는 정암진을 근거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육지에서의 승리가 대부분 수성전(守城戰:이정암의 연안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인데 반하여 곽재우는 전략요충지를 설정한 뒤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물에서는 이순신, 땅에서는 곽재우라는 말을 낳을 정도로 그의 전술은 탁월했다. 그는 조총을 겁내지 않았다. 조총의 사정거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에 의해 전라도 상륙이 좌절된 왜군은 함안, 의령 등을 지나 전라도로 들어가기 위해 정암진 도하작전을 기도하였으나 곽재우 의병이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곽재우는 강 가운데 장애물을 설치하여 왜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기습하는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였다.

 곽재우 의병의 활약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육로를 통하여 전라도로 들어가려던 왜군의 작전을 수포로 만들어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왜군이 전라도를 장악했더라면 이순신의 수군도 보급이 끊기고 무기의 제조가 불가능하게 되어 바다에 고립되지 않았을까? 따라서 곽재우 의병의 활약은 수군의 승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황해도 연안의 이정암은 연안성을 중심으로 수성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의병의 숫자는 500여 명, 왜군의 숫자는 무려 6,000여 명이었다. 이정암은 연안성을 공격해온 구로다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연안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안대첩은 조선 정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의주와의 연락로 확보에 기여하였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의 대적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이후의 전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조·명연합군의 반격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있던 왜군은 명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명은 평양이 함락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파병을 결정하였다. 7월에 요양 부총병 조승훈의 5천여 명의 병력을 1차 원군으로 파견하고 12월에 들어서 이여송 제독의 4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2차로 파견, 본격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여송군은 대포와 불화살로 치열한 공세를 퍼부은 끝에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여송은 후방의 적을 무시하고 계속 한양으로 진격하다 왜군 정예병의 매복 공격을 받고 벽제관에서 대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급이 끊긴 왜군은 속속 남쪽으로 후퇴하는데 구로다군은 개성으로 가토군은 서울로 퇴각하였다.

 이듬해 전열을 정비한 조선군의 반격이 전개되었다. 2월15일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는 완전히 우리쪽으로 돌아섰다. 20배가 넘는 왜군을 격퇴한 이 장쾌한 승리는 군과 민이 합심하여 이룩해 낸 결과였다. 그러나 행주대첩 이후 권율 장군이 “우리에게 화차가 없었다면 승리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승리의 요인이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음을 일깨우 준다. 즉, 뛰어난 무기 제조술이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4월 20일에는 도성 한양을 탈환하여 왜군은 패색이 짙어졌다. 다급해진 일본은 시간을 벌기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명의 파병은 조선의 회복을 위함이 아니라 왜군의 중국 진출을 막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입장은 우리와는 달랐다. 명은 심유경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휴전 교섭에 들어갔다. 일본은 명의 황녀로 일본의 후비를 삼고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하라는, 애초부터 성사되기 어려운 휴전 조건을 내세웠다. 심유경은 이러한 일본의 요구를 본국에 알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봉공안(封貢案 : 일본을 명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일본 국왕을 제후로 봉한다는 내용)'을 일본에 보내 휴전 협상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정유년 재침을 명령하였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나 남아 있사오니...
-왜군의 재침과 격퇴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 왔다. 당시 왜군은 가토, 고니시, 소오가 이끄는 모두 1만 4,5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은 고니시의 계략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의주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원균이 삼도 수군통제사에 올랐으나 칠천량에서 대패, 전사하여 한산도 수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육군이 호남과 호서지방을 장악하고 수군은 전라도 해안을 공격하는 왜군의 전략대로 8월16일에 남원이 함락되고 이어 전주까지 점령되었으며 구로다군은 직산까지 북상하였다.

 그러나 9월에 들어서 명군이 소사평에서 구로다군을 격퇴하고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에 기용되어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서진을 봉쇄하였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병선이 남아 있사오니 나아가 죽기를 각오로 싸운다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절대절명의 상황에서도 명량 앞 울돌목의 급류를 이용하여 왜선단을 유인, 12척으로 300여 척의 적 함대를 격파하는 기적의 승리를 이루어냈다.

 겨울이 되자 왜군은 남해안으로 집결하여 왜성을 수축하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갔다. 왜성은 둘레에 해자(연못)를 파고 성을 겹겹이 쌓아서 만든다. 왜군은 전투 시에는 맨 아래의 성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그 선이 무너지면 바로 위의 성으로 철수하여 저항하였다. 이러한 왜성을 함락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명은 12월에 4만5천의 병력을 파견하여 울산을 공격하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이듬해(1598년)에는 병력을 증강시켜 14만 명의 군사로 울산, 사천, 순천 등지의 잔류 왜군을 총공격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후 조선과 명의 수륙군은 바다와 육지에서 왜성을 포위하고 물이나 식량을 구하러 나오는 왜군의 목을 베어 버렸다. 조명 연합군의 고사작전으로 왜성의 왜군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 말을 잡아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듬해(1598년) 8월 도요토미는 회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이에 따라 왜군은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 떄가 수륙협공 작전으로 왜군을 섬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명나라 제독 유정은 왜장 고니시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왜군의 퇴로를 열어 주었다. 뒤늦게 왜군의 철수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였다. 그리고 노량해협에서 마지막 섬멸전을 벌여 200여 척을 격파하는 결전을 벌이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줄어들어
- 임진왜란의 영향

  전쟁과 왜군의 인명 살상으로 조선의 인구는 격감하였다. 왜군은 철수할 때 더욱 많은 사람들을 살상하였다. 한양이 수복된 후 도성 안에는 인마의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하였다. 왜군에게 잡혀간 부녀자, 어린 아이들은 노비가 되었다. 경제적인 피해도 막대하였다. 막대한 인명이 손실되고 농토가 황폐해져 국가 재정을 극도로 악화시켰고 양안과 호적이 거의 없어져 행정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왜란이 끝난 후 50년 뒤인 광해군 때 인구 150만명 토지가 50여만결에 그칠 정도였다. 왜란 직전의 경지면적이 170만결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경제적 피해의 규모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경복궁과 불국사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고 사고와 서적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명은 대규모 원정군 파견의 후유증으로 점차 쇠약해져 갔다. 명의 세력이 약화되자 만주에 있던 여진족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청교체기가 도래하여 대륙의 정세는 혼미해졌다. 일본은 고대 문화의 일본 전파이래 단시일에 최대로 한국 문화를 수입하여 일본 중세문화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들이 가져간 [퇴계집]과 왜란 중 강제로 끌려간 성리학자에 의해 일본 성리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농민 포로, 납치된 도공에 의한 농업과 도예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활자의 유입으로 인쇄술도 발전하였다. 심지어 두부 제조술까지 받아들이는 등 일본은 전란을 통하여 이른바 도쿠가와 시대 중세문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도움글 - 거북선은 돌격선

 조선 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대략 판옥선 10척당 거북선 한 두 척의 비율로 선단이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거북선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전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진법’이 가장 중요하다. 즉, 해전에서 전선들이 진을 치는 방법이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조선 수군은 학익진(공격시), 첨자진(이동시) 등의 진법을 가지고 있었다. 왜군에게도 나름대로 진법이 있었다. 거북선은 그러한 왜선의 진영을 흐트러트리는 돌격선 역할을 했다고 한다. 거북선의 전면 하단에는 귀면 돌기가 있어 적의 배에 구멍을 내고, 용두에서 뿜는 불은 적선의 돛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이렇듯 거북선이 주로 적진에서 육탄전을 감행하는 까닭에, 적병이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철갑을 씌우고 쇠살을 꽂았다고 한다.




조선의 전함 : 1550년 을묘왜변 때 왜군의 대단위 습격을 받아 전라병마사가 전사하고 전라남도 땅 태반이 전란에 휩싸였다. 이 때 칼을 빼어들고 상대방의 배에 뛰어들어 공격하는 것이 장기인 왜구들을 상대하면서 개발된 배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선체가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성루와 같았기 때문에, 해전 때 다람쥐같이 칼을 들고 배에서 배로 뛰어다니는 왜구들을 상대하는 데 적합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판옥선에 아예 철갑을 덮고 쇠살을 꽂은 것이 바로 거북선이다. 이렇듯 조선의 전선은 왜구를 소탕하는 가운데 개량되어 왔기 때문에 일본과의 해전에서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조선의 화포 : 화포는 주로 무쇠 덩어리를 발사하여 적의 배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데 쓰였다. 이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된 장군전, 차대전 등도 있었다. 이것은 화포에 끼워 쏘는 굵고 커다란 일종의 화살인데 여기에는 쇠로 된 날개가 달려있어 발사후 방향을 유지시켜 주었다. 이것이 일단 적의 배에 명중되면 화포탄보다 더 큰 구멍을 뚫어 순식간에 적선을 침몰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순신의 전술 : 이순신의 해전에는 화포를 발사하면서 접근하여 배를 붙인 다음 적선에 올라 선상 격투를 벌이는 중세 해전의 전형적 형태란 없다. 따라서 왜군이 배를 육지에 대고 도망가도 그 수급(머리)을 베기 위해 육지에 내려 추격하는 법도 없었다. 이는 육박전에 능한 왜군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이순신이 취한 냉철한 태도였다. 또한 우리의 전선은 견고하지만 왜선은 가볍고 빠르다는 점을 이순신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견고하다는 것은 그만큼 무겁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꾼의 피로도 빨리 온다. 따라서 이순신은 전투에 임해서는 언제나 속전속결로 끝내는 전술을 구사했다. 적의 강점을 피하고 우리의 강점을 살리는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역량이 수군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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