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통치체제 재정비

  19세기 전반은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노론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는 정치적 견제를 받지 않는 독재정치였다. 따라서 정치 기강은 해이해지고, 중앙에서부터 향촌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삼정의 문란1)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불만도 극에 달하여 평안도 농민전쟁(홍경래난)과 임술 농민 봉기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렇듯 전국을 뒤흔든 농민 봉기는 세도정권의 동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조선 왕조 자체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1864년, 안동김씨의 세도와 횡포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왕족 이하응은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왕위에 세움으로써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서양 세력의 통상수교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을 취하고, 대내적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강력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대원군이 내정을 협찬함이 마땅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권

  세도정치는 나이 어린 국왕에게 딸을 시집보낸 외척들이 정치를 좌우하던 시기였다. 세도 정치 하에서 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고 세도 가문의 권력은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세도가들은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권력 유지를 위하여 왕실에 대한 견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철종 때의 세도 가문인 안동김씨 역시 자신들의 권력 장악 및 유지에 방해가 될 만한 왕족들은 여러 가지 누명을 씌워 제거하였다. 그와 같은 안동김씨의 횡포 속에서 이하응은 스스로 파락호2) 행세를 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는 상가집을 쫓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기도 하고,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거리에서 투전판을 벌이기도 하는 등, 스스로 왕족답지 않은 행동을 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사정권을 비켜갔다.

  그렇게 때를 기다린 이하응은 철종이 주색에 탐닉하고 후사가 없자, 철종 사후를 도모하기 위한 은밀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하응은 왕위 계승에 결정적 권한을 쥐고 있던 조대비(익종비)에게 접근해서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들이게 하는 한편, 명복이 왕이 되면 그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하여 김병국을 설득해서 안동김씨 세력의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였다.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은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여 임금의 도량이 있으니 들어와서 대통을 잇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어서 “국사 다난한 지금에 만기가 엉클어져 있으니 대원군3)이 내정을 협찬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사실상 이하응의 섭정4)을 공식화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하응은 권좌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 못한다.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흥선대원군의 내정 개혁 목표는 전제왕권을 강화하여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그 뿌리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그는 우선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몰아내고 몰락한 남인, 북인당파와 지방의 토호까지 기용하는 등 평등한 인재 등용을 표방하고 실천하였다. 이는 당시 민중들의 공격 대상이었던 지방의 탐관오리들을 일부 경질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외척의 세도정치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함으로써 통치기구를 재편성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세도가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폐지하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는 한편,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했다. 아울러 법치질서의 확립을 위하여〈대전회통 大典會通〉을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또한 서원의 신설을 금지하며 기존의 서원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고 축소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서원은 외척이나 노·소론 당파들과 긴밀히 연결된 지방 양반들의 소굴로서 많은 면세토지와 노비 등을 가지고 권세를 부려 지방 사회에 끼치는 폐단이 극심했다. 그리하여 지방 양반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1년에 가서는 전국 6백여 개의 서원중에서 사액서원5)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이에 양반들이 대대적으로 저항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 못한다. 하물며 선현께 제사를 지내는 곳에 도적이 숨어서야 되겠느냐?”며 서원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 국고에 귀속시켰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세도 정권 붕괴의 원인은 삼정의 문란6)과 그에 따른 농민 봉기의 확산에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 정권에 떠넘겨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먼저 전세 행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전세 부과의 기준이 되는 토지를 정확하게 조사하는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군포 행정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인두세로 부과되던 군포를 신분에 관계없이 호당 1필씩 내게 하는 호포제의 실시로 양반들이 상민과 같이 군포를 부담하게 되었고, 상민들은 장정 수에 관계없이 호당 1필씩 부담하게 되어 그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삼정 중 폐단이 가장 심했던 환곡은 수령과 아전들을 배제시키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창제로 바꿈으로써 관리들에 의한 부정과 비리를 차단하려고 노력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60여 년 동안 추락한 왕실의 위엄을 되살리기 위해 경복궁 중건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대역사는 불행하게도 일반 백성들로부터도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문제는 막대한 재정의 조달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막대한 기부금을 거두어 들였다. 대원군정권은 그 기부금을 원해서 내는 것이라 하여 ‘원납전(願納錢)’이라고 불렀으나, 백성들은 강요에 못 이겨 원망하면서 내는 ‘원납전(怨納錢)’이라고 불렀다.

  또한 부족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해 발행한 악화 당백전(當百錢)은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조선시대의 화폐는 요즘의 화폐와 달라서 그 자체가 ‘실물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즉, 상평통보 한 닢의 가치는 그것을 주조하는 데 든 구리만큼의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상평통보의 5,6배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당백전을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하는 값으로 강제 통용시킴으로써 혼란이 야기되었다. 말하자면 5원 짜리 동전을 100원짜리로 통용시킨 셈이었다. 백성들은 처음에 당백전을 기피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평통보를 녹여서 당백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악화(당백전)가 양화(상평통보)를 구축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물가가 1∼2년 사이에 무려 6배까지 폭등하고 화폐제도 전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도성의 출입문들에서 백성들로부터 통행세까지 징수하는 등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2천 5백만 냥의 막대한 경비 조달과 백성들의 부역동원을 통하여 착공 40개월 만인 1867년 6월에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 사업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당시 경복궁 공사장에 수차례의 방화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사업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다.

  대원군의 내정개혁은 매우 강력했다.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한 것은 이전의 그 어떤 국왕, 또는 정치가도 하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개혁은 기울어져 가는 조선왕조체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호포제 실시와 서원 철폐는 그것을 목적으로 한 재정 타개책이었다. 이미 70%에 이른 양반 계층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하여 조선 왕조가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실시한 호포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이 추구한 개혁은 근대적인 체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체제의 재확립을 꾀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개혁은 전근대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네놈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강화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양요(洋擾)7)

  1856년 애로우호사건8)으로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1860년 체결된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애로우호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을 세계 제일로 여기던 우리 사고는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남하 위협이 현실화되었고 우리 사회 전반에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흥선대원군이 등장했고 그의 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나타났다.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 정책을 썼다. 이는 대원군을 비롯한 당시 지배층이 천주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러시아 이외의 다른 서양나라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그들의 진출을 저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에 반대하는 관리들이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였고, 나중에는 여기에 조대비까지 가세를 하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난관들을 일거에 극복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섰고 그로 인해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필두로 홍봉주, 이선이 등이 붙잡혀옴으로써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동안에 약 만여 명의 천주교도가 체포 처형되었으며, 조선교구에서 활동하던 11명의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 9명이 붙들려 처형되었다. 같은 해 6월말 리델 신부는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조선을 탈출 주중국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Roze) 해군소장에게 박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8월 로즈는 3척의 군함을 이끌고 남양만에서 강화해협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서울 근방 양화진, 서강 부근까지 불법 침입하였다. 그들은 곧 서울 부근을 겨냥하고 몇 발의 함포를 발사하였다. 그들은 이런 위협만으로 능히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군 이용희의 지휘 아래 한강 일대의 방비가 강화되고 민중들이 자진해서 의용병을 편성하는 등 조선이 결사 항전의 태세를 갖추자 프랑스 함대는 일단 정찰만 한 후 철수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군을 지휘하였던 올리비에는 정족산성과 같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야전 포병 1개 중대 가량이 필요하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단순한 군사적 점령에서 전쟁체계로 전환하지 않고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로즈 제독은 강화에 대한 일격을 가한 것으로 만족하면서 조선 정부에 속하는 모든 시설을 파괴한 후 퇴각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40일 간에 걸친 병인양요가 끝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외규장각 도서들도 이때 약탈당했던 것이다.

  프랑스인의 침략과 약탈로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있을 때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의지를 더욱 굳어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상하이(上海)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 오페르트는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했다. 그러자 같은 해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洪城郡) 구만포(九萬浦)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했다.

  “너희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원래 왕래도 없었고, 은혜를 입거나 원수를 진일도 없다. 이번 덕산 묘지에서 저지른 사건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네놈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뿐이다.”(오페르트 서신에 대한 영종 첨사의 회신) 이 사건으로 남의 조상을 파헤치는 서양 놈들은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니 도저히 상종할 수 없다는 각오가 조야에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해왔다. 제너럴셔먼호는 상선이었지만 대포 2문과 완전무장한 승무원 19명이 타고 있는 사실상의 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견지하고 있던 터라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즉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프레스턴 일당은 조선의 요구를 묵살하고, 야간에는 상륙하여 약탈까지 자행했다. 이에 조선 측은 썰물 때를 이용하여 작은 배에 연료를 싣고 불을 지른 다음, 그 배를 제너럴셔먼호 쪽으로 흘러가게 함으로써 제너럴셔먼호를 소각시켜버리고, 2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이때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은 전멸했으며, 조선 측에서도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황해도 및 평안도 연안에 무장선들을 파견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소재를 찾았으나, 큰 성과 없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미국은 1871년 대한포함외교9)정책을 수립하여 뒤늦게 조선침략을 감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미양요이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는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 결과 미국 측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어재연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어재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 : 지구전)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생각하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전의를 불태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으면 강화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러나 강화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는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배척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 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미국 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 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 다음날 전 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물리친 값진 승리였다. 페리호의 포함외교에 쉽게 굴복해버린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대적으로 외압이 느슨하던 시기에 나라의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는 데 아쉬움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즈음의 역사를 보면서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역사적인 전환점에서 얼마나 심사숙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기도 하다.


1) 삼정(三政) : 전세, 군포, 환곡을 둘러싼 폐단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환곡의 문란이 가장 심했다.

2) 파락호(破落戶) : 행세하는 집 자손으로 난봉이 나서 결딴난 사람을 뜻함.

3) 대원군(大院君) : 조선 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嫡子)나 형제가 없어 종친이 왕위를 이어 받을 때 새 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던 말이다. 조선의 대원군 제도는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데서 비롯되었다.

4) 섭정(攝政) : 끼고 정치한다는 뜻으로 국왕의 나이가 어려 누군가 대신 정사를 맡아보는 것을 뜻함.

5) 사액서원 (賜額書院) : 조선시대에 왕으로부터 서원명의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받은 서원.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였다.

6) 삼정의 문란 : 전세를 징수하는 전정,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 빈민구제제도인 환곡의 고리대화 등의 폐단으로 세도정치기에 절정에 달함.

7) 양요(洋擾) : 서양 오랑캐가 소란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병인양요는 병인년(1866년) 프랑스의 침공을, 신미양요는 신미년(1871년) 미국의 침공을 일컫는 말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한불전쟁, 한미전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8) 애로우호사건 : 1865년 홍콩 선적의 영국 선박을 중국 세관원들이 수색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기를 끌어내린 사건을 빌미로 삼아 영국과 프랑스가 청을 공격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

9) 포함외교 : 대포를 쏘면서 위협하여 문호를 개방시키는 무력외교방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