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과 강화도조약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민씨정권은 그들이 대원군정권과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1)를 다시 복구하는 등 서원의 전면적 복구와 함께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인하하거나 탕감해 주었다. 그러나 조세 경감 정책이란 국가 재정이 효율적으로 운영될 때 가능한 조치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민씨정권이 민심 잡기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있었다.

 반면 민씨정권의 대외정책은 전통적인 종속관계에 있던 청국에 의존하면서도 그 속에서 일정한 개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민씨정권이 취한 대일 유화외교는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2)을 부르짖던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 운요오호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을 빌미로 조선의 개항을 도모하였다.


고종이 장성했으니 친정(親政)이 가능하다

- 흥선대원군의 퇴진과 민씨세력의 집권

 민비는 영의정 민치록(致祿)의 딸로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지 못했고, 더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경계심으로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1866년 민비는 양오라비인 민승호를 병조판서에 앉힌데 이어 여흥 민씨 일족들을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원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최응(흥선대원군의 친형)과 풍양 조씨의 조영하 등 반대세력을 규합하여 이미 1870년대 초두에 민씨세력은 확고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871년에 민비는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자, 흥선대원군이 진상한 산삼(山蔘) 때문이라고 단정,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태웠다. 그러던 중 1873년 일본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이어 1873년 최익현(崔益鉉)을 앞세워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올리게 하여 고종의 친정(親政)3)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대원군을 몰아내고 민씨 외척정권을 수립하였다.


각국이 호시탐탐하는데 일본이 우유부단하면 기회를 잃을 것이다

- 운요호 사건과 조선의 타율적 개항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동양에서 유일하게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 간에 식민지 쟁탈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은 1870년대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조선의 영토를 정복하고 약탈하는 침략의 길로 나아갔다.

 1872년 일본은 중국과 종속관계에 있던 오끼나와 제도를 정복하였으며 1874년에는 대만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조선에 대한 침략도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미 대원군 집권 시기에 그들은 ‘국교 개선’이란 명목 하에 조선에 대하여 수차례 침략적 요구를 제기하여 왔으나 대원군의 완강한 통상거부정책에 의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1872년경부터 일본 군벌들은 무력으로 조선을 정복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정한론’은 일본 지배층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아 한 때 일본내각회의에서 정식 의결되어 구체적인 조선 침략 계획까지 작성되기도 하였다.

 1875년 5월, 일본 정부는 조선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불의의 사변’을 날조하였다. 그들은 ‘연습 항해’라는 명목 하에  운요호를 포함, 군함 3척을 우리나라 남동해안 일대에 파견하여 조선 연해에서 정찰을 실시하는 한편, 부산항 내에서 함대의 전투연습을 실시하는 등 고의적인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만행에 대하여 조선 정부는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일본에 대해 엄중 항의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고무된 일본은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를 동원 또 다시 예고 없이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였다. 우리 해안포대는 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운요호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우리 측으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불의의 포격’에 대한 ‘보복적 공격’이라는 명분 하에 본격적인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오히려 조선정부에 그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 하에 대함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군사적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선정부에 속히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 줄 조약체결을 위한 교섭을 개시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함포를 쏘아대면서 교섭이 결렬되면 개전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였다. 그들이 벌인 이른바 ‘포함외교’는 당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투적 수법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그와 같은 방법으로 개항을 당했고, 그들은 자신이 당한 방식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여 일본의 요구를 빨리 거절하고 이를 격퇴할 것을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유생들은 연일 상경하여 국왕에게 왜적을 격퇴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일부 군인들과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침략자들과 일전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런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박규수 등 통상개화론자들이 개항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었다. 박규수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청이 서양의 대포와 화륜선(火輪船)4)을 모방 제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많다.” 고 보고하며 통상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비록 조선이 문호를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항이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민씨정권은 서양 세력 배척의 구호를 내세워 척사파의 반발은 무마하되, 청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과의 옛 관계를 부활한다는 명목 하에 조약의 체결을 추진해 나갔다.

 조선 정부의 조약 체결 방침이 알려지자 일본과의 수교를 결사반대하던 척사파의 최익현은 1876년 1월 23일 도끼를 갖고 올라와 국왕의 행차 길을 막고 일본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이른바 ‘5)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며, 개화된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같으므로(倭洋一體論) 일단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 그들의 침략을 막기 어렵고 우리나라는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정권의 대외정책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종속관계에 의존하는 가운데 일정한 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즉 대원군 정권의 통상 수교 거부정책 특히 대일 강경외교에 반대하여 대원군 계열의 외교 담당자들을 처단·파면하고 대일 유화외교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들은 준비도 없이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하듯 개방정책을 취하여 나라의 위기를 촉진시키고,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을 부르짖던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볼 틈을 주고 말았다.

 민씨정권은 결국 일본 측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개항과 수교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다

- 강화도조약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강화도 조약의 제1조는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청(淸)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행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었다. 제2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을 규정하였다. 그 결과 동해안에는 원산이, 서해안에는 인천이 각각 선정되었다. 또한 제4조와 제5조에서는 개항장 내에 일본인의 집단 거류지인 조계(租界)를 설정하여 그 안에서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주택 건립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할 것을 규정하였다. 제7조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연해(沿海)를 자유로이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제8조와 제10조에는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범죄자들에 대해 현지에 파견된 일본영사가 재판한다는 치외법권의 조항이 명시되었다.

 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租借地)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들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司法權)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치외법권과 연해 측량권은 우리 주권에 대한 결정적 침해였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그 부수 조약인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를 허용함으로써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용이하게 한 반면, 조선은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취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볼 때 개항과 통상은 시대적 대세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개항은 준비된 개항이 아니었다. 미처 준비되지 않았던,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개항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국면은 이후 우리에게 좀 더 현명하고 능동적인 대처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조선의 앞길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외세에 의존해서 집권 유지에만 안간힘을 쓰던 민씨세력, 개화와 척사를 둘러싼 국민적 합의 도출의 실패 등이 미구에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1) 만동묘(萬東廟) : 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2) 정한론(征韓論) :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일본 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조선 정벌론. 그들은 왕정복고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대륙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친정(親政) : 몸소 정사를 맡아본다는 뜻으로 수렴청정이나 섭정을 배제한다는 뜻.

4) 화륜선(火輪船) : 물레바퀴 모양의 추진기를 단 기선. 스크루를 이용하기 전에 있었다.

5) 지부상소(持斧上疏) : 최익현이 도끼를 가지고 엎드려 상소했던 일로 개항을 반대하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 개항에 대한 결사반대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