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요산제(樂山齊)의 좁고 어두운 방에서
사과 궤짝으로 만든 책상 위에서
하루 10시간씩 원고를 쓴 임종국.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3·1의 함성이 무성한 여름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일제 침략과 친일파] 서문에서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제 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韓末)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 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 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5·16을 불러들였다."
 -[제 2의 매국, 반민법의 폐기]에서

평생을 친일 문제 연구에 바쳐온 재야 사학자,
1989년 11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빈소에서는 유명 인사의 화환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낸 일에 비하면 신문에
제대로 된 부음기사 하나 실리지 않았다.
그는 저명 인사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 주류 사회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친일문학론]은 친일문학에 대해 낱낱히 파헤친 최초의 실증적 연구로
1965년 한일회담에 대한 경고장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1965년 6월 22일)

임종국의 나이 서른 일곱이던 1965년,
14년간 끌어오던 한일회담이 막바지에 이르고,
해방 20년 만에 다시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된 것이다.

그러나 굴욕적인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다.
과거 청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국교를 맺는 것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친일세력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힘을 합쳐서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강화도 조약의 재판이라는 것이었다.

임종국 또한 이것을 제 2의 망국의 길이라 보았다.
그는 20년 전 해방될 때의 경험을 떠올린다.

"8·15를, 17살 때 해방을 맞았는데
 중학교 강당을 빌려가지고 일본 군대들이
 한 10일 정도 있다가 간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는 상등병 하나가 내게 묻더군요.
 '자네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선이 독립되게 돼서 좋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군인이 잡아 먹을 거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더군요.
 한참 쳐다보면서 생각을 하더니,
 '20년 후에 만나자.'
 그렇게 얘기하면서 끝났거든요.
 하도 상대방이 노려보는 눈이 무서워서
 인상에 박혔던 건데 그러고선 잊어버리고 있었죠.
 1965년이 되니깐 한일회담을 한다고 야단이예요.
 한일회담을 하는 걸 보니깐
 그 전에 20년 후에 만나자고 하던 게 생각이 나더군요."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그 놈들은 1개 병사들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사는데,
 우리 장관이란 사람은
 '제 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라는
 타령을 하는 판이다.
 이완용이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
 -[친일문학론] 서문

그가 그런 한일회담을 바라보며 울분을 느끼며
단숨에 써내려간 책이 [친일문학론]이다.
2천 매 쓰는데 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66년, [친일문학론]이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 현대사를 이끌어 온 지도 세력들의
치부를 건드리며 도전장을 내민다.
친일문학론은 일제시대 친일 인물들과 친일 단체들의 행적을 낱낱히 밝히고
역사 앞에그들의 반민족 행위를 고발하고 있었다.

김동인, 김동환, 김소운, 김안서, 노천명, 모윤숙
백철, 유진오, 이광수, 이효석, 정비석.

그 중에는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닦은 유진오같은 인물도 있었고
이효석, 정비석 처럼 낯익은 소설가들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친일파였다고 선언하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는 일이었다.
또한 임종국 자신으로서는 문제의 인물로 낙인 찍히는 일이었다.

1,500부가 찍혔으나 그 해 다가도록 500권 미처 안팔렸다.
어떻게 알려졌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일본에 알려져
1,000권 대부분이 조금씩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임종국, 그의 책 [친일문학론]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것은 일본이었다.
1976년 친일문학론은 일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친일문학론]을 번역한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쓰오 교수는
이 책이 감정적으로 쓰인 인신 공격이 아님을 강조했다.

"친일문학자들을 하나도 규탄하고 있지 않습니다.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사실로써 독자들을 설득하는 형식입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료집 같은 것입니다.
 자료를 가지고 말하는 방법이 문학자로서도
 역사학자로서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오무라 마쓰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실증적인 임종국의 서술 태도에 감탄했다.
이후 학자로서 평생을 교류하게 된다.
오오무라 교수는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들을 구해
임종국 선생에게 보내주었다.

임종국은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으나 도봉구 창동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임문호는 1930년대 천도교 청년당 당수로 활동하던 종교 지도자로
창동 일대에 9만8천여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촌 운동과 자활학교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임종국의 가족들은 남의 땅을 밟고 다니지 않았다.

임종국은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청년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악보를 직접 손으로 베껴 보관하기도 했고,
키타와 아코디언 연주도 수준급이었다.
음악가의 길을 꿈꾸던 감수성 풍부한 청년 임종국은
아버지의 기대로 1952년 고려대 정외과 입학한다.
한 때 고시공부에 매달리기도 했으나
후일 그는 전쟁 직후 혼란 속에서 개인의 성공에
집착했던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한 많은 피난살이 속에서
 그런 울분과 충격도 낡은 앨범처럼 퇴색해 가고,
 땃벌떼다 정치파동이다, 휴전회담이다로
 어수선한 세월이 흘렀다.
 폐허에서 하루의 삶에 쫓기던 나는
 판사 검사가 돼서
 떵떵거리고 살아야겠다는 엉뚱한 꿈에 사로잡혔다."
 -[내 필생의 작업-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중에서

그러던 그는 당시 고려대 국문과 교수였던 조지훈 선생을 만난다.
그때부터 그는 고시 공부를 접고 문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시(詩)로 등단했지만 평론에서 두각을 보였다.
학생 시절 그는 이미 소설가 이상에 대한 평론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1956년 3권에 걸친 [이상전집]을 내기에 이르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이상에 대한 연구는 시작도 안되었던 때였다.
이상의 자당이 살아 있던 때에 이상에 대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수합한
그의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이상 연구의 표준이 되고 있다.

그는 한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와 역사, 그리고 그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동시에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시대가 작가를 통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었는지
역사와 시대를 작품과 연관시켜 해석하는
이른바 문학사회학적 접근이었다.


그런 그에게 65년 한일회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 이후에 생겨날 제 2의 이완용, 제 2의 송병준에 대한
경고장으로 나온 것이 바로 [친일문학론]이었다.

"독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할 것은
 이 책을 쓴 임종국이는 친일을 안했을까.
 이것은 아닐까한다.
 이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
 필자는 자화상을 그려야겠다.
 이 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놈한테서
 김구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하러 조선엘 오지?'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그 무렵의 내 정신연령이 몇 살쯤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도 회의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일문학론] 서문, '자화상'

그렇게 친일문학론은 역사에 대한 자각과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친일문학론은 단순한 고발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 앞에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살아있는 기록이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반성은 곧 자기 아버지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천도교 당수로서 전국을 순회공연하며 내선일체를 강연했던
아버지 임문호의 행적을 세상에 공개했다.

" 임문호(임종국 아버지)는, 37년 9월 4일-27일 백동빈, 임문호, 김병제로써 금산, 회령, 함흥 외 35개처를 순회강연케 하는 한편, <비타산적으로 내선일체의 정신을 발휘하고 거국일치의 백력을 고양하자>는 등의 삐라를 발행케 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누구는 쓰고 누구는 안쓰고 근거가 확실한 것을 내 아버지라고 해서 뺀다면 다른 사람들 것도 안써야 할 것이다. 임종국의 아버지 임문호도 거기에 대해서 일절 말이 없었고 괘씸하다는 내색을 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를 이은 다음 대상은 스승이었다.

그는 은사 유진오의 친일 행적을 밝히는 한편, 아버지의 사랑방에 드나들던 백철, 조용만, 조연현 등 내놓라하는 문학계 인사들까지 역사 앞에 반성해야 할 인물로 지목했다. 혈연, 지연, 학연을 넘어서 오로지 역사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일문학론이 나왔던 60년대 중반은 친일 문제 자체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시대였다.

창씨명 다카기 마사오, 일본 육사 57기생이자 만주 군관학교 2기생인 박정희가 쿠테타로 민선정부를 뒤엎고 권을 장악한 때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함께 친일 세력들이 고위 관리와 함께 문화계 주요 인사로 등장했던 그 때 친일문학론의 출간은 그들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스승인 조지훈 선생도 제자의 신변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내가 이것을 쓰면 문단에서 처세하기 불리할테니,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말려야 하는데,
 민족정기를 생각하면 말릴 일도 아니고...
 아마 스승의 마음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술과 바꾼 법률책]중에서

친일문학론은 주요신문에 5단짜리 광고를 내면서 등장했다.
그것은 친일 세력들에게 던져진 도전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친일문학론이 도매상이라면 우리 평론가들은 거기서 물건을 가져다 파는 소매상에 불과했다."
 -[임헌영]


이렇게 나온 친일문학론은 비뚤어진 현대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역사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바춰보는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은 친일 세력을 그대로 기용했다.
그들이 일제에도 충성을 바쳤다면 미군정에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 10년은 친일파들이 요직을 장악해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 때 장관이 115명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2부 이상을 역임한 사람은 빼야겠죠.
 16명이 빠져요. 그러면 96명이 남게 되죠.
 제가 친일파 관계를 샅샅이 조사를 하지 못했어요.
 제가 조사한 범위 안에서 33명, 즉 34%가 친일 경력이 발견이 되요.
 해외 망명을 했다. 독립투사 출신이다. 4명밖에 안되요.
 불과 4프로, 5프로 미만인데 친일세력은 34프로 훨씬 압도적으로 많아요.
 그런 상황에서 거기서부터 민족사회의 근본이 빗나가기 시작했죠."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이미 정부 관료의 상당수를 친일파가 차지한 가운데
제헌국회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단을 위한 특별법안을 심의 상정했다.
여론에 밀려 뒤늦게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한달 뒤인 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본격적으로 친일파에 대한 제보를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친일파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 대상은 비행기 공장을 세워 일제의 침략 전쟁에 기여한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었다.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을 비롯해서 소설가 이광수도 체포되었다.
그러던 1949년 4월, 특별법 제정을 주도한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 세력들이 주된 역할을 하는 반공 대회는 기승을 부렸고
반민특위는 빨갱이 세력으로 몰렸다.
결국, 1949년 9월 5일, 한 장의 기념 사진을 마지막으로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모든 문서는 친일 경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민족정기라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거든요.
 거기서 어떤 문제가 파생하느냐,
 우리 자신이 친일파와 마찬가지 인물이 되어버렸어요.
 자손들한테 민족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겠어요.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왔고,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그 세대로서
 대한민국 전체가 그런 식으로 되어버렸다는 것, 그게 큰 문제예요.
 후세에 대해서 민족정기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거
 이건 앞으로도 그 구정물이 100년이 지나서 가셔질지 50년 지나서 가셔질지
 아니면 200년 지나야 가셔질지 알 수 없는 상태 그거 생각하면 한심할 때가 많죠."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그렇게 일제 청산은 실패했다.
친일 세력들은 발빠르게 미군정을 등에 업고 친미파가 되었고
반공을 내걸며 민족 세력으로 둔갑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들은 주류 세력을 이루어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역사를 거듭해 6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이들은 독재의 핵심세력을 이루며 분단을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친일파들은 우리 현대사 매 시기마다
스스로 사회 특권층이 되어 지도급 인사로 행세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과거 친일 행적을 밝히는 연구는 금기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용기있게 뛰어든 사람이 임종국이었다.
1988년 그는 한 일간지(한국일보)에 시론으로 가미가제 특공대
마쓰이 오장의 전사를 예찬했던 한 시인의 행적을 비판하고 나선다.
그 시인은 다름 아닌 서정주였다.
시인 서정주는 일제 식민지 막바지인 1944년,
가미가제 특공대를 예찬하는 마쓰이 오장 송가 를 발표한다.

"마쓰이 오장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경기도 개성사람
 ......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 강산이여
 한결 더 짙푸루른 우리의 하늘이여"

임종국이 문제 삼은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분노한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성은 커녕 변신을 거듭하며
불의와 결탁하는 친일파들의 모습이었다.
일제시대 가미가제 특공대를 예찬하던 서정주는
5공화국 때는 전두환 대통령 56세 생일을 맞아
그를 찬양하는 축시를 보낸다.

"처음으로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

한강을 넓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 오시나이다."

그러고도 서정주는 결코 역사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친일을 처벌하지 못하는 역사를 오히려 농단했다.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종천순일파?

.....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는 이의가 있다.

......

나는 이 때 그저 다만,
좀 구식의 표현을 하자면-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라면
'종천순일파(從千順日派)'같은 것이 괜찮을 듯하다.

......"

따라서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른 종천순일파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지식인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의 친일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중앙대 노동은 교수가 민족 음악가로 알려진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발견했을 때
그에겐 다양한 경로로 압력이 들어왔다.[한국 민족음악 현단계]
이런 저런 압력과 나중에는 빨갱이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런 식의 위협은 임종국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일제 청산에 성공하지 못했던 우리 역사,
이에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숱한 압력을 감수하며 그는 본격적으로 친일 연구에 돌입한다.
일제시대 자료가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던 고려대 도서관 근처에 하숙집을 잡았다.
그리고 서고 한 켠에 아예 지정석 하나를 정했다.

"고려대 도서관에 가서 엣날 책을, 잡지 같은 것을 뒤지는데 먼지가 퀘퀘 앉아 있어요.
 해방되고 난 다음에 20년 동안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았나 보더군요.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하나 있더군요. 맨날 옛날책을 뒤지고 있어요.
 저 친구 누군가 해서 얼굴을 알게 돼서 서로 인사를 하게 되고,
 나중에 알고 보니깐 김윤식씨더군요."
-[임종국 육성/1988년 8월 임헌영과의 대담]에서


임종국의 연구 방법은 철저히 실증하고 고증하는 방법이었다.
어두운 과거를 추적하는 일이니만큼 그 자료들이 더욱 정확하고 꼼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남선, 노천명이 어떻게 학도병 자원을 독려했는지,
이광수가 언제 창씨개명의 취지를 선전했는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 나갔다.
그 때 그가 모은 자료들은 현재 민족문제 연구소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대부분의 자료들은 손으로 직접 베껴썼다.
그리고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6하원칙에 따라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친일파 연구를 위해 그는 일제 시대 신문을 비롯해서 정부 기록, 재판 기록,
하다 못해 면사무소 인사 발령까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연도, 개인, 단체별로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10년 간 자료를 모아 80년대 들어서는
거의 1년에 한 권 꼴로 친일파 관련 책을 써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던 길, 그는 홀로 그 길을 갔다.

그렇게 축적된 임종국의 연구는 지난 9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를 가려내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그 때 친일 행적이 드러난 사람 중에는 부통령 또는 국회의원을 지낸 정계 인사,
그리고 문화계 저명 인사들도 있었다.
친일파가 독립 유공자로 기록되고 포상받는 현실,
그는 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첫걸음이 바로 친일파 청산이라 보았던 것이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후세로 이어지면서 더 큰 왜곡과 혼란을 낳고 있다.
2003년 5월 29일 경남 마산에서 열린 조두남 기념관 개관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곡 선구자의 작곡자 조두남의 친일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몇몇 시민 단체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 시작한 기념관은 굳게 문이 잠겨 있다.
누가 나에게 졸을 던질 것인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를 기념하라고 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적인 가치 또는
사회 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아닌가.
청산되어야 할 역사를 소중한 역사인 양 기념하는 것은
그 잘못된 역사를 오늘, 그리고 미래에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게 임종국의 생각이었다.

친일 문제를 그냥 덮고 가자는 세력과 잘못은 반성해야 한다는 세력,
그리고 현실적인 이익을 지키려는 쪽과 역사의 근본을 세우려는 쪽,
이 둘 사이의 갈등을 임종국은 선택의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역사 앞에 그것은 너무나 명료하고도 절실한 문제였다.
임종국은 역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았다.
병든 곳을 잘라내거나 치유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도 계속 성장할 수도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임종국은 친일 문제 연구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서
천안에 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곳에서 땀흘려 밤농사를 지었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연구비를 충당했다.
친일 연구는 돈도 따르지 않고 명에도 돌아오지 않는 일이었다.
그의 생활은 정말로 가난했다.
그러나 그는 권익이나 자본에 결탁하지 않았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준다 해도 시간을 빼앗길까 거절했고,
붓끝이 흐려질까 사양했다.
어렵게 살면서도 주위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재력가가 있었음에도
나는 너같은 놈의 돈은 받지 않겠다 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고집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외로운 길이었다.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는 길이었기에 더욱 쓸쓸했다.
가끔씩 찾아와주는 친구들만이 그의 큰 뜻을 알아줄 뿐이었다.
그러던 몇년 후 그는 요산제를 내려와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더 이상 밤농사만으로는 연구비를 충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연구에만 전념하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집 한 채만 남기고
나머지는 연구비로 쓰기 위해서 내려왔던 것이다.

다섯평 남짓 작은 서재는 그가 일생에 받쳐 수집한 자료들로 가득했다.
이 방안에서 그는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할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모두 10권 규모의 친일파총사 작업, 사상 침략, 정치 침략, 문화 침략 등
모두 10개의 세부사항으로 나누어서
지금까지 그가 해온 연구를 총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상 원고지 분량 20만 매, 집필기간만 해도 8년 이상 걸리는 대규모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료 정리를 모두 마치고 막 집필에 들어가려는데 그에게 안타까운 고비가 찾아든다.
담배를 매우 즐겼던 그에게 폐기종이란 진단이 나온 것이다.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면서도 친일파총사 집필에 대한 그의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1876년부터 1945년의 모든 사회분야에 걸친
 침략배족사 전8권을 8년 작정으로 완결할 생각이다.
 그러고서도 천수가 남으면 가볍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문학사회사의 꿈이나 쫓고싶다.
 친일배족사 8권을 끝내기 전에는 고향(문학)이 그리워도 갈 수가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내 필생의 작업-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중에서

그러나 그에겐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친일파총사에 대한 계획도 그리고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리란 희망도
모두 미완으로 남겨둔 채 그는 그만 펜을 놓아야 했다.
1989년 11월, 그는 60세로 생을 마감했다.
꽃 한 송이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영정 앞엔
그가 손수 적은 친일파 인명 카드가 바쳐졌다.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원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60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국, 그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1만2천명 인명카드를 비롯해서
수많은 자료들만이 남아있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채 자료들로만 남아있는
그의 친일파총사 계획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제 청산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일파들이 정권을 바꿔가며 비틀어놓은 우리 현대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
임종국은 그것이야말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제 2의 반민특위가 부활하려는 지금,
그것으로 비뚤어진 우리 현대사의 진상이나마 밝혀낸다면,
임종국, 그가 혼자 걸어온 길은 결코 외롭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임종국]


[친일문학론]에 실린 친일문인단체와 친일파

■친일단체--------------------------------------

조선문예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황군위로작가단
조선문인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황도학회
임전대책협의회
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
조선임전보국단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문인보국회
만주국예문가회의
대화동맹
조선언론보국회
대의당

■친일파----------------------------------------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량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팔봉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백   철  유진오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효석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 이 글은 KBS 인물현대사 9회 "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임종국"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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