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기 흰 셔츠 입은 아줌마는 왜 저렇게 뚱뚱해?"

뉴욕의 한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 옆 테이블에서 피자를 먹던 눈이 파란 꼬마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아이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들 중에는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는 거란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야. 이해했지?"

내가 예상하던 답이 아니었다. 한동안 엄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라면 뭐라고 했을까. 우리 엄마들이 흔히 말하던 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너도 그렇게 먹다가는 저렇게 돼. 알아서 해!" 그런데 그 엄마는 아이가 사람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해주었다. 아마 장애인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엄마, 왜 저 사람은 다리가 하나야?"라고 묻는 아이에게 겉모습만 서로 조금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것이다.

나는 가끔 '초딩' 꼬마들을 보면서 성악설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너 엄마 있어? 엄마 없지?"하며 엄마 없는 친구를 놀리는 그 아이들은 그런 말을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상대가 가장 아파할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갓 태어난 동생이 받는 사랑이 얄미워 아무도 모르게 꼬집는 형은 그런 것을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그 아기에게 줄 수 있는 아픔은 아직 신체적인 것밖에 없음을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그게 본성이라면 사람의 근본은 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선하게 태어났다가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다치며 점점 악해지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악했으나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과 함꼐하면서 점점 더 선해지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세상이 사람들에게서 배우며, 선해지는 장터이면 좋겠다.

-이종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