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단 한 묶음과 갖가지 모양의 금빛과 푸른빛의 채단을 집 종에게 함께 부쳐 서경으로 보내네. 모름지기 산을뒤에 두르고 시내을 앞에 둔 집을 그려주시게. 온갖 꽃과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두고, 가운데로는 남쪽으로 마루를 터주게. 그 앞뜰을 넓게 하여 패랭이꽃과 금선화를 심어놓고, 괴석과 해묵은 화분을 늘어놓아 주시게.


동 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 천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구리병에는 공작새의 꼬리 깃털을 꽂아놓고,비자나무 탁자 위에는 박산 향로를 얹어놓아 주게. 서쪽 방에는 창을 내어 애첩이 나물국을 끓여 손수 동동주를걸러 신선로에 따르는 모습을 그려주게.


나 는 방 가운데에서 보료에 기대어 누워 책을 읽고 있고, 자네와 다른 한 벗은 양 옆에서 즐겁게 웃는데, 두건과 비단신을 갖춰 신고 도복을 입고 있되 허리띠는 두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야 하네. 발 밖에서는 한 오리 향연이 일어나야겠지. 그리고 학 두 마리는 바위의 이끼를 쪼고 있고, 산동은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꽃잎을 쓸고있어야겠네.


이러면 인생의 일이 다 갖추어진 것일세. 그림이 다 되면 이수준 공이 돌아오는 편에 부쳐주시게.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네.

-허균이 1607년 정월 평양에 가 있던 화가 이정에게 보낸 편지글.


이인문의 <수로한거도>
허균이 이정에게 부탁한 것과 비슷한 구도로 된 선비의 거처이다. 한양대박물관 소장.

정 민님이 지은 <미쳐야 미친다>(2004년, 푸른역사)에 소개된 허균의 편지와 그림이다. 책에는 이정의 <산수도>도 소개되어있다. 허균은 이 그림을 받지 못했는데 평양에 가 있던 이정이 이 편지가 도착하고 나서 며칠 안 되어 갑자기 세상을 떳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망원인은 술병으로 이정의 나이 서른이었다고.

허균으로서는 친구와 함께 하는 거처를 꿈꾸고 이상을 함께 노래하면서 친구와 함께 나누는 것 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꿈을 가지고 있다. 노후를 자연속에서 <유유자적>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위도식>하고 싶은 것이 내 희망이지만 요즘 선전을 보면 무시무시하다.
당신, 10억은 준비하고 그런 꿈을 꾸심니까?그리고는 이렇게 저렇게 안하면 당신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함께 마음을 나눌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10억이 아니어도. 허균이 이정에게 부탁한 저 그림속의 집은 그런의미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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