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감영 건물까지도 죄 부셔


또 한가지 궁금한 점을 물으셨는데, 도대체 우리나라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외국에 뺏겼는가 하는 얘기였습니다. 제가 한국미술사, 즉 우리 미술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일본을 식민지화하기 전에는-진짜로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완전한 우리나라 미술사를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이 문화재를 뺏겼기 때문이지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잔칫상, 예를 들어 경기 감영(監營)이라고 하면 그곳에서 이런저런 잔치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상이 수백 개에다 그 상마다 각각 그릇이 다 있었을 것인데, 지금 그런 게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유물은 커녕 감영 건물 전체가 없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죄 부셔졌기 때문이지요. 눈에 보이는 궁궐, 감영, 현아 등 조선의 문화를 회상케 하는 건물은 하나하나 참 애써 쫓아다니면서 알뜰히도 부셨습니다. 지금도 도시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관청이나, 초등학교, 경찰서, 병원 이런 근대 건축들은 꼭 옛날 큰 건물들이 있었던 자리의 원래 집들을 파괴하고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깡그리 부시는 것이 아니라, 참 고약하게도 반병신이 되게끔 여러 건물 중 한 채만 남겨 놓고 부셨습니다. 옛날에는 빈 땅도 많았는데 굳이 그렇게 한 것은 조선 문화를 말살하겠다는 집요한 목적,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지금 청주나 대구 같은 곳의 감영 자리에 가보세요. 덩그러니 집 한 채만 남아 있어 참 멀뚱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원래 조선의 문화는 엄청난 규모나 화려함으로 승부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깊은 사려와 높은 안목에 바탕을 둔 절묘한 공간 배치로, 집과 집들이 교묘하게 연결되고 그 동선을 따라 거닐다 보면 천변만화하는 기막힌 장면 전환이 계속되곤 했던 것입니다. 그걸 죄 부셔 놓고 집 한 채만 남긴 건 정말이지 악랄한 짓이었습니다.


일 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은 아예 헌병을 세워 놓고 개성 왕릉이며 강화도의 분묘를 도굴해 갔지요. 기록을 보면 태평양전쟁 말기, 즉 1941~1943년 무렵에 우리 국보급 문화재가 한 해에 만 점 이상씩 A급만 쏙쏙 뽑혀서 일본의 도쿄, 교토, 오사카 3대 도시의 백화점이나 호텔에서 경매되었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남아 있지도 않은 순 A급만 뽑아서 말이지요. 그래서 광복 당시 골동 상인들이 어떤 얘기를 했느냐 하면 "이제는 좋은 물건 다 나갔으니 앞으론 이 장사도 때려치워야겠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화재라는 것은 연어처럼 물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원래 소장했던 사람으로부터 점점 더 돈 많고 권력 높은 사람한테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요. 일본이라는 사회는 굉장히 안정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부자가 갑자기 가난뱅이가 되고 귀족이 평민으로 곤두박질치고 그런 일은 극히 드뭅니다.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 당시에 중장, 소장, 대장들이 약탈한 물건들은 더 높은 정치가들을 거쳐 천황가(天皇家)에까지 올라가고 했으니까, 이런 물건들은 지금 완전히 오리무중인 셈입니다.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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