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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방의 빛을 찾아서


2010.08.16.월요일

충용무쌍 

 

 


정용기, 원스 어폰 어 타임(Once Upon A Time in Korea), 2008

 

 

광복절 특집이라고 간밤에 KBS에서 재미난 영화를 해줬습니다. 2년 반 전에 개봉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이라는 시대물인데, 광복절 특집 영화 답게 시대 배경이 일제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를 배경으로 한 '명랑 활극' 이라는 건 좀 어색하실 겁니다. "뜨거운 아이스크림" 이라는 말처럼 '일제' 와 '명랑 활극' 은 같이 쓰기엔 망설여지는 말이죠. 응당 광복절 특집 영화라면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쏟아져야 할 것 같은데, 괴도루팡과 인디애나 존스를 반쯤 섞어 놓은 듯한 주인공이 뺀질뺀질 '민족정신은 무슨~ 오까네가 아리마셍인데~' 하는 대사를 날려대는 영화, 저야 배꼽잡고 웃었지만 경박하다고 느끼신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하지만 굉장히 의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부터 건축무한 육면각체, 바람의 파이터, 놈놈놈에 이르기까지. 일제시대가 시대극의 배경으로 정말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유쾌하고도 발랄하게 '가지고 놀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앞으로 이런 시도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틀을 깨는 시도가  결말 또한 '확 깨는' 신선한 마무리로 이어졌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결말이 어땠는가하면... 거참, 개봉하고 나서 계절이 여러번 바뀐 영화니까 미리이름(Spoiler)걱정 없이 그냥 죽죽 풀어보겠습니다. "석굴암 본존불 백호자리에 어른 주먹만한 금강석(다이아몬드)이 박혀 있었는데 일제 말에 공출로 사라졌다." 는 유명한 야사(野史)에서 영화는 출발 합니다. 이제 '동방의 빛' 으로 명명된 그 문제의 3000캐럿(!) 짜리 다이아를 놓고 일본군, 독립군, 사기꾼, 여도적이 각축전을 벌인다가 큰 줄거리 입니다. 

 

결말에 이르면 그 '동방의 빛'이 실체를 드러내는데 이게 정말 문자그대로 '확 깨지면서' 끝나는 겁니다. 역시  이 글을 통해 영화를 찾아보실 분들을 위해서라도 미리니름은 그만할랍니다. 다만 천부인을 진짜 4천6백년 묵은 도장이라고 믿거나 이세신궁에 삼신기라는 칼,거울,구슬이 실물로 보존되어 있다고 우기는 결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진짜 동방의 빛은 우리의 얼과 혼 입니다' 하는 뻔한 결말도 아닌, 제 3의 결말이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진짜 석굴암 본존불 이마에 박혀 있었던 보석은 정체가 뭐였을까요?

  

 

 석굴암 본존불 클로즈 업

이마 한 가운데 분명 타공이 있다.

 

 

석존의 영성이 한데 모여 온 천하를 비춘다는 이마의 백호. 불국토(佛國土)를 거대한 기획으로 잡고 국책사업으로 세운 석굴암의 백호는 분명 엄천난 것으로 장식되었을 텐데. 더구나 신라는 수도 이름 부터 황금성(金城 영어로 옮기면 무려 골드캐쓸!)이었던 화려찬란한 땅이었는데. 금과 옥구슬로 대중에게 기억되는 화사한 고대, 찬란함 그 자체인 신라에서 과연 본존불의 백호를 무엇으로 채웠을까?  비싸고 값진 것 하니까 우리에게는 당장 어른 주먹만한 3천캐럿짜라 다이아몬드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백호 자리에 있었던 보석의 정체는 의외로 싱거웠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예 보석 축에도 들지 못하는 물건이 분명합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유리 (Glass)

 

 

 

 '아니 동네 문방구에 가면 백원 오백원하는 유리구슬이 어른 주먹만한들 얼마나 나가겠나, 금으로 도배를 하고 살던 신라사람들이 그깟 유리구슬로 석굴암을 장식했다고? ' 물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천년전, 한반도 남단에 석굴암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분명 설득력 있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동방의 빛' 이 실존했다면 필시 어른 주먹만한 유리구슬이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경주 황남대총 남쪽봉분 출토 봉수 유리병

 

 

오늘날 유리는 일상에서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지만 1200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유리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B.C. 1세기 부터 A.D. 5세기 사이, 유리는 지중해 인근에서만 생산되는 특산품이었습니다. 이름부터 지중해에서 왔음을 강조하는 로만 글라스(Roman Glass)는 신라에서 부의 상징 그 자체인 물건이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을 표하실 분들이 있습니다. 신라에서 진짜로 유리제품을 사용했을까? 당시 신라에서 유리를 주조했다는 기록은 전혀없는데. 그런데 유리로 된 유물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1960년대에 경주 대릉원 발굴작업이 본격화 되자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는데 황남대총을 비롯한 왕릉군에서 유리제품이 쏟아져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거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겁니다. 유리가공법을 모르던 4,5세기 신라 고분군에서 어떻게 유리가 나올 수 있나, 누가 가져다 묻어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기물의 소재와 양식은 같은 시기 시리아, 흑해 연안에서 생산된 유리기물들과 일치합니다. 비슷하다, 영향을 받았다 이 정도가 아니라 '시리아에서 생산된 물건이 신라까지 건너갔다' 고 밖에 설명이 불가능한 물건들 입니다. '미소짓는 목걸이'로 알려진 미추왕릉 출토 유리구슬 목걸이를 보면 추정은 확신이 됩니다. 2센티미터 남짓한 유리구슬에 당시 유리세공기술로써는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색조상감으로 백조로 보이는 새와 벽안의 미녀가 새겨져있습니다. 유럽에 서식하는 조류와 색목인(色目人: 서구인)을 신라인들이 직접 그려넣었을까? 그렇다기 보다는 이 녀석도 지중해에서 건너온 물건이라고 보는게 더 설득력 있습니다.

 

 

 


 

미추왕릉 출토 옥유리구슬 목걸이

 

 

상식선에선 도저히 해석불가인 상황이 엄연한 유물들을 통해서 규명되는 상황. 결국 당시의 학계에선 고심끝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까지 수입된 지중해의 로만글라스가 어쩌다 한 두개 신라로 흘러들어간 것' 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중국에도 저런게 나오겠지 그러니까 한다리 더 건너서 신라까지도 올 수 있었겠다 하는 생각. 하지만 중국이 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중국 고고학계와 교류가 시작되자 이런 짐작도 영 개운치 못한 게 되었습니다. 중국, 그리고 일본에도 이런 형태의 봉수병이 출토 된 전례가 전무했던 겁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이건 동요 가사니까 나오는 이야기고 현실의 벽은 가혹합니다. 로만글라스의 본고장인 로마 콘스탄티노플에서 신라의 금성까지는 대략 9000Km의 거리. 이건 자꾸 걸어나가서 해결 될 성질의 것이 아닌게지요.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수십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를 1200년전 사람들이 왕래했을까? 자 한번 찍어 봅시다. 서기 5,6세기 사람들이 9000km를 주파하는데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1)3년    2)2년   3)1년    4)반년   5)3개월

 

 

  

부왁!! 이 정도가 9천키로미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1,2번을 찍습니다. 80일만의 세계 일주도 아니고 4,5번중에 하나로 답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잘못 읽은 경우빼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정답은 아마 4번과 5번 사이 였을걸로 봅니다.

 

이제 딴지가 환단고기빠들 뺨치는 환타지 역사소설을 쓰려고 하는 구나! 하기 전에 한 번 계산을 해봅시다. 아라비아의 보부상 압둘라씨가 성인남자의 평균적인 구보 속도 시속 4km로 하루 10시간을 걷는다고 쳤을 때. 하루에 40km이동으로 9000km를 나누면? 225일. 한달을 30일로 잡고 나누면 225일은 7개월 하고도 보름!  이건 어디까지나 압둘라씨가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자고 남는 6시간은 밥도 해먹고 객잔에서 쉬면서 술도먹고 화투도 치고 술안주로 무모하게 대운하나 파대는 2MB, 아니 아니 수양제 뒷다마도 까대면서 유유자적하게 이동할 때의 이야기. 느긋하게 움직여도 로마와 신라사이는 7개월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됩니다.

 

빽태클은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도로는 고사하고 루트도 불확실했을 시대인데 생각처럼 쑥쑥 뚫렸을것 같나? 그러나 장건의 실크로드는 그보다 수백년전에 이미 등장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5,6세기면 우리가 실크로드로 알고있는 스텝의 초원길, 중앙아시아의 사막길, 바닷길 모두 열려있는 시대 입니다. 그리고 하나 있는데 사람의 발이 아닌 "사막의 배, 낙타" 가 출동했다면 어땠을까요? 500kg에 달하는 짐을 싣고 별다른 보급(휴식)없이 수십키로미터를 성큼성큼 나아가는 낙타. 낙타를 이용하면 대규모의 무역과 훨씬 더 빠른 이동이 동시에 가능해집니다! 

 

인문지리적 요소또한 동서의 소통에 윤활유 역활을 했을 겁니다. 동로마-압바스-수,당-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국벨트" 는 군소국들이 난립해 세금과 관세를 빈번하게 받아내고 치안이 불안정했던 시절보다 안정적으로 교역이 가능하게 해줬을 겁니다.

 

 

자, 중간결산.

 

 

1. 9000km는 분명 길지만 1200년 전에도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다.

2. 선박과 낙타의 활용이 대규모 상단의 운용을 가능하게 해줬다.

3. 규모의 경제는 초 장거리 무역의 위험부담도 감내하게 해준다. 

4. 전 세계적인 정치적 안정이 초 장거리 무역을 지원해줬다.

 

 

처음에 어느 아랍인 보부상 압둘라씨가 하루 10시간씩 걸어서 이동했을때 7개월 반이 나왔습니다.

 

그럼 대규모 상단이 낙타와 같은 이동수단을 활용해서 실크로드를 내달리면......?  베테랑 항해사가 순풍을 타고 홍해에서 울산항까지 직배송을 때려준다면? 이동속도는 배가 될 겁니다. 신속배달에 뜻을 품고 잠을 줄여가며 여분의 낙타떼를 준비해 번갈아 타면서 사막길을 질주했다면 2개월도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고 봅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면 이번에 사료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삼국사기 잡지를 보면 통일신라 흥덕왕 9년인 서기 834년, 사치풍조가 심해지자 이를 경계하여 골품과 관등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복식과 소비품, 악세사리등을 아주 시시콜콜하게 정해놓은 기록이 등장합니다.

 

 

삼국사기 제 33권, 잡지 제2. 

 

眞骨女

진골여자

 

表衣, 禁喬·繡錦羅

겉옷. 모직, 수놓은 비단 나직 금지.

 

內衣·半臂·袴·襪·履, 禁喬·繡羅

속옷, 반팔, 바지, 버선, 신에  모직, 수놓은 비단 나직 금지.

 

ㅁ : 及繡用金銀絲·孔雀尾·翡翠毛者

모직과 금은실, 공작꼬리와 비취모사용 금지.

 

梳, 禁瑟瑟鈿·玳瑁, 釵, 禁刻鏤及綴珠

비녀,금실을 새겨 넣거나 슬슬전, 구슬 다는 것 금지.

 

冠, 禁瑟瑟鈿

모자, 슬슬전 박는 것 금지.

 

布, 用二十八升已下. 九色禁紫黃.

베는 28새 이하를 사용, 아홉 색깔 중에서 자황색의 사용금지

 

 

이 장에서 눈여겨 볼것은 모직, 슬슬전, 공작꼬리 입니다. 공작은 신라에 살지 않았으니까 전량 서역에서 온 수입품이었겠죠. 공작 꼬리 옆에 묻어가는 비취모는 캄보디아쪽에 사는 열대조류의 깃털 입니다. 무역로가 동남아로도 뻗어 있었을 정도로 다양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슬슬전은 타슈켄트와 같은 중앙아시아 쪽에서 나오는 에메랄드, 비취로 추정 됩니다. 모직이란 털옷이나 직조물을 뜻하는 것일텐데 직조기술이 없는 당시 지구상에서 모직 카페트는 전량 페르시아 산이었습니다.

 

페르시아산 카페트, 공작털, 에메랄드 목걸이. 동시대의 로마나 바그다드의 사교파티에 나가도 전혀 꿀릴 게 없는 패션 감각 아닙니까? 작년에 히트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가리(加厘)비빈 가리반(加厘飯 카레밥)이 등장했다지요. 이것 또한 역사적 상상력에서 지어낸 게 아니라 통일신라의 최대 교역항 이었던 울산항 반구동 발굴지에서 얻은 고고학적 증거를 반영한 결과 입니다.

 

신라 사람들, 콘스탄티노플이나 바그다드에 가도 꿀리지 않을 엣지있는 옷맵시로 카레까지 먹었답니다.

 

 


 아아, 인도 인도 인도사이다!

 

 

통일신라는 로마와 동시대를 호흡했다! 무모한 추정이 아니라 고고학적 증거와 사료가 뒷받침하는 사실 입니다. 경주의 귀부인들은 집안에 페르시아산 카페트를 깔고 지중해에서 직수입한 에메랄드 목걸이와 공작꼬리로 한껏 멋을 부린 뒤 로만글라스에 술을 담아 가든파티를 즐겼던 겁니다. 이게 하도 유행을 하니까 나라에서 '망조가 든 퇴폐 사치 풍조' 라며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라니, 1200년전 9000km라는 물리적 장벽을 뛰어넘어 신라와 로마가 동시대를 걸었다는 이야기, 사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제일 처음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 유리, 유리는 대체 어땠을까. 유리는 신라시대에 지중해에서만 독점적으로 생산되는 사치품인데 유물과 사료를 바탕으로 신라와 로마는 지금으로 치면 항공택배 뺨치는 직배송 시스템을 갖춘 무역국이었다는 사실은 확인 됐습니다.  중국에서 쓰다남은거 몇개 중고로 들여온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유리장인 카시우스 씨의 장부에 '오다 : 색조유리병 다기 세트 2정,  클라이언트 : 쉴라 금성의 성골귀족 김무식씨' 라고 되어 있었을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중해의 로만글라스들이 신라에 거침없이 들어온 게 사실이라면 당시 유리의 가치는 대체 얼마나 했을까?

  

         

 

송림사탑 출토 사리장엄(신라)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통일신라, 보물1359호)

 

 

위에 주욱 나열된 사리장엄들을 봐 주세요. 고승들이 열반하고 나면 남는 사리를 담는 병,합,상자등을 통칭 사리장엄구라고 부릅니다. 불국토 신라에서 가장 가치있는 귀금속-이라기엔 약간 어폐가 있지만 일단-은 사실 부처의 진신사리 입니다. 이 귀한 걸 감싸는 사리장엄구들은 재료부터 무조건 금,은,옥같은 귀금속이고 제작기법까지 극한의 기교를 쏟아부어서 금실이나 금편을 만든 뒤 정교한 상여나 가마의 모양으로 재조립 했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게지요.상자속의 상자, 상자를 열면 그 안의 함, 함안에는 병, 병안에는 사리. 그럼 최종적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감싸고 있는 투명한 호리병의 정체는?

 

그게 바로 유리병입니다. 새끼 손가락 만한 호리병이나 자그마한 유리잔이 최종적으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담는 용기로 사용 됩니다. 유리에 비하면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금박지도 "포장지" 에 불과했던 게지요.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앞서 말한 직배송루트로 로만글라스를 수입해 썼을 때 이문이 남기 위해선 유리값이 얼마나 되었을까를 추산해 봤습니다. 금본위제를 기준으로 금값대비 유리값을 구하면 유리의 가격은 무려 금값의 3배 이상!!  금값의 3배이상이라는 것은 이윤을 얻기위한 마지노 선이지 그위로는 5배가 될지 10배가 될지 압둘라씨가 부르는 게 값이었을 겁니다.  

 

신라시대, 유리는 금값보다도 비쌌던 겁니다.

 

 

이제 동방의 빛이 주먹만한 유리구슬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는걸 이해하시겠죠.신라시대, 수도 금성은 넘치는 재화와 부를 수입 사치품 소비에 쏟아붓는 황금성이었고 지중해에서 건너온 유리는 다이아몬드 보다 더 값졌습니다. 대형 고분군에 출토가 집중되는 것으로 보아 진골들도 함부로 못쓰고 성골층에서만 통용되던 보석중의 보석이었을 겁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동방의 빛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석굴암 본존불의 백호는 분명 유리구슬이었을 겁니다.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비운의 마의태자가 입에 물고 금강산 양지바른곳에 조용히 누었다는 물건은, 3천캐럿짜리 다이아보다 유리구슬이었다는게 더 현실성 있지 않겠습니까?

 

감독이 직접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간밤의 광복절 특집 영화는 유리값이 금값의 3배가 넘어갔던 1200년 전 신라를 되돌아보게 하는 유쾌한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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