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책(空島策)은 말 그대로 섬을 비우는 정책이다. 공도책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시기였다. 고려말은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던 시기였다. 최무선, 최영, 이성계로 대표되는 것처럼 왜구를 격퇴한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영웅시되었을만큼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고려 정부에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왜구가 고려를 침탈한 것은 식량, 노예, 그리고 귀중품 따위를 노략질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크고 인구가 많아 방어가 쉬운 섬(제주도, 거제도와 같은)과 도시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민을 내륙으로 철수시키는 방어책을 구사하였다. 서남해안의 어지간한 섬들은 거의가 공도정책으로 텅비게 되자 왜구는 좀더 육지를 침탈했다. 대표적으로 고려시대 청자의 산지였던 강진의 대구만 일대와 부안 변산의 유천리 도요지 일대도 모두 비게된다. 그리하여 청자의 생산이 중단되고 내륙지방인 광주 충효동과 같은 곳에서 분청사기가 나타나게 된것다. 왜구는 침탈을 위해서는 좀더 내륙으로 들어와야 했고 앞에서 언급한 장수들은 내륙전투를 통해 왜구를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왕조가 안정을 찾자 왜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강화하고 왜관무역을 통해 달래는 정책으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섬과 해안일대는 100여년 가까이 비어있었던 까닭에 소유관계도 명확치 못한 경우가 많아 말을 기르는 목마장으로 활용하거나 공신들에게 사패지로 주어졌다. 대체로 큰 섬들은 성종대를 전후하여 다시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지만 작고 외딴 섬들은 16-17세기에야 사람이 거주할 수 있었다.

최근 섬지역의 패총을 발굴하면 신석기-청동기-원삼국-삼국-고려로 이어지던 패총이 단절되었다가 16-17세기부터 다시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공도책의 반영이다. 예를 들면 홍도와 같은 외딴 섬은 게속해서 비어있다가 숙종때에 이르러서야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울릉도와 독도의 공도책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출처 낯선 길을 헤매는 즐거움 | 핫쥬시
원문 http://peeris.blog.me/10003634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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