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수업] 조선시대 공도정책에 대하여...| 한국역사의 이해(3시)
이창훈 조회 74 | 2010.05.26. 01:01 http://cafe.daum.net/leech0412/NrZ1/19

독도 발표수업에서 나왔던 공도의 시기에 관한 부분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울진현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태조(太祖) 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태조는 태종의 잘못인데, 조금 더 뒤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를 태종으로 바로잡았습니다)

 

김인우로 하여금 울릉도를 조사하게 한 것은 태종 16년(1416) 9월 경인일의 일입니다. 앞서 태종 3년(1403) 8월 병진일에 울릉도 거주민들을 육지로 나오라는 명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 후에도 울릉도에 은닉한 사람들을 적발한 사례들이 보이다가, 성종 2년(1471)에 강원도 관찰사 성순조에게 명하여 태종대 이후 울릉도에 들어간 자들을 색출하라고 명하였고, 이듬해 6월 경축일에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박종원이 다녀온 사실을 토대로 섬이 비워져 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후 숙종대 안용복의 사건이 있은 후, 2년에 한번을 원칙으로 울릉도에 대한 정기 점검(수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8월 계유일에 울릉도로 백성들을 이주하여 취락을 조성할 것을 결정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울릉도의 관리와 관련하여 문제가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일이었지만, 조선왕조 건국 이후 공도가 정책적으로 시행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적인 취락 형성은 19세기 말로 추정되기 때문에, 공도 기간은 15세기초~19세기말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도가 곧 주권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공도 기간 중에도 지속적인 관리와 감시가 이루어졌음도 역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공도와 관리의 부분은 울릉도에 관한 것인데,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정할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당연히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하는데, 일본측은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 점에 대한 사료적 검증은 조선시대 기록들에서 울릉도(무릉도)와 함께 小島/우산도 등의 표현으로 함께 기술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그리고 일본측 기록인 '은주시청합기'에서도 은기도 일대를 시찰한 후 보고하면서 울릉도와 독도 지역을 조선 측 영토로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의 독도 귀속권 문제는 사실상 별 논란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위에서 이용한 사료는 별도로 표시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그외 문집들에 대한 부분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를 이용하여 검색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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