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장자]

from 좋은글모음 2010. 9. 2. 22:12

 눈앞의 대상에만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을이 되면 물이 불어난 모든 냇물이 황하로 흘러든다. 그 본 줄기는 커서 양편 물가의 거리가 상대편에 있는 소나 말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황하의 신은 기뻐하며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이 자신에게 갖추어졌다고 생각하고,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가 북해에 도착했다. 그 곳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물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황하의 신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을 우러러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속담에 백가지 도리를 알고는 자기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일찍이 공자의 넓은 지식을 낮게 평가하고 백이 같은 절의를 가볍게 여기는 이론을 듣고도 지금까지는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선생님의 끝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런 것 같이 느껴집니다. 제가 선생님의 문하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위대한 도를 터득한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북해의 신이 말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어름에 대해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해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위대한 도리를 얘기해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의 물 중에 바다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며, 잠시도 흘러듦을 멈추지 않는 데도 차서 넘치지 않는다. 미려에서는 바닷물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 나가지만 물이 마르지 않는다. 봄이나 가을에도 변화가 없고, 장마가 지나 가뭄이 드나 영향이 없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보다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는 수량으로 계측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으로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받았고, 음과 양으로부터 기운을 받았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작은 나무나 작은 돌이 마치 큰산에 있는 것이나 같은 존재이다.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크기를 헤아려보면, 소라 구멍이 큰 연못가에 나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한 나라가 세상에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곡식 알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건의 종류에는 몇 만이라는 숫자가 붙는데 사람들이 그 중 하나의 숫자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곡식들이 생산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에 널리 살고 있는데, 사람이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만물과 비교해 본다면 말의 몸에 있는 하나의 가는 털에 지나지 않는다. 오제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준 것이나, 삼왕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하는 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이 작은 일이다.

백이는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얘기하여 박학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지혜에서 나온 분별과 평가는 무의미한 것이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하늘과 땅을 크다고 하고, 털끝은 작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아니다. 물건이란 양이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각자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똑같이 본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 무시하지 않고, 큰 것이라 대단히 여기지 않는다. 물건의 양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옛날과 현재를 한가지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 해도 교만하지 않고, 생명이 짧다 해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은 달처럼 찼다 기울었다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물건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분수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란 넓은 것임을 분명히 알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해서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비길 것이 못 된다. 또한 살아 있는 시간이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것이 못 된다. 그런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려 들기 때문에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털끝이 지극히 미세하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지극히 큰 영역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절대진리는 상대적 비교를 초월한 곳에 있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세상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지극히 정세한 것에는 형체가 없고, 지극히 큰 것은 포괄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볼 수가 없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정세하다는 것은 작은 것 중에서도 미세하다는 뜻이다. 극대하다는 것은 큰 것 중에서도 아주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 볼 수 없고,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자연의 형세가 그런 것이다. 정세하다느니 굵다느니 하는 것은 형체가 있어서 결정되는 것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수량으로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포괄할 수 없이 큰 것은 숫자로서 크기를 따져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 있는 것이란 물건으로서 큰 것이다. 뜻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물건으로서 정세한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 없고, 뜻으로서 살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정세하고 크다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평가를 초월한 위대한 인물이란

위대한 사람의 행동은 사람을 해치는 짓을 하지 않고 어짊과 은혜를 많이 베풀려 하지도 않는다. 행동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없지만 문지기나 노예를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재물을 위해 다투지 않지만 사양하는 것을 훌륭한 것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일을 함에 있어 남의 힘을 빌리지도 않지만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으며, 탐욕 많은 자나 비열한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세속과 다르지만 치우치고 기이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행동은 여러 사람을 따르지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의 벼슬이나 봉록으로도 그의 행동을 유도하기에는 부족하고, 형벌이나 치욕으로도 그를 욕되게 하기는 부족하다. 그는 옳고 그름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며, 작고 큰 것도 분별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듣건대 도를 터득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남이 알아주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자기의 분수를 한정하고 지내는 지극한 경지인 것이다.


  상대평가는 절대평가에 미치지 못한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물건의 외형이나 내면에 있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귀하고 천한 구분이 생기며, 무엇을 기준으로 작고 큰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은 귀하고 남은 천한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어느 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 중에 크지 않은 것이 없게 되며, 어느 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 중에 작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하늘과 땅도 큰 것과 비교를 하면 작은 풀 씨 한 알 정도로 생각될 수 있고, 털끝도 작은 것과 비교하면 큰 산 정도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공용(功用)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공용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쓸데 없는 것이란 없게 되며, 그 공용을 없다고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 중에 쓸데 있는 것이란 없게 된다. 동쪽과 서쪽은 서로 반대가 되면서도 서로 어느 한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안다면, 곧 공용의 규정도 상대적인 것임을 알 것이다.

취향이란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그러함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옳지 않은 것이란 없게 된다. 그것이 그름을 비난하는 입장에서는 만물에는 그릇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요임금이나 걸왕이 모두 스스로는 시인하면서도 남이 비난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취향이란 것도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시대와 환경에 자연스럽게 따를 줄 알아야 한다

옛날에 요와 순은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제업을 이루었고, 연나라 임금 증은 재상의 아들 지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은 다툼을 통해 왕이 되었으나, 초나라 백공은 다툼으로 멸망했다.

이처럼 다투고 사양하는 예절이나, 요임금과 걸왕 같은 행동은 때에 따라 귀하게도 되고 천하게도 되는 것이어서 일정한 표준에 의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들보나 기둥같이 큰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작은 구멍을 막는 데는 소용이 없다. 그것은 기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는 삵쾡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도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산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데 어찌 옳다는 것을 존중하고 그르다는 것은 무시하며, 다스림은 존중하고 혼란은 무시하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은 존중하면서 땅은 무시하고, 음은 존중하면서 양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버리지 않고 내세우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 것이다.

옛날 제왕들을 보면 물려주는 방법이 서로 달랐고, 하·은·주 3대의 왕위 계승 방법도 각기 달랐다. 그 시대와 어긋나게 하고, 그 때의 세속을 거스르는 자를 두고 찬탈자라 부르며, 그 시대에 합당하게 하고 그 때의 세속을 따르는 사람을 두고 의로운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평가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

황하의 신이 말했다.

“저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제가 사양하거나 나가거나 멈추는데 있어서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천히 여기겠는가? 이런 경지를 혼돈하게 통일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뜻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에 크게 어긋나게 된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적다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런 경지를 구별 없이 연결되는 상태라 말하는 것이다.

한편에만 치우치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에 어긋나게 된다. 엄격하기가 나라의 임금과 같아서 사사로운 은덕을 베푸는 일이 없어야 한다. 유유자득하기가 제사를 받는 땅의 신과 같아서 사사로이 복을 내려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범하기가 사방이 끝없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한계도 없어야 한다. 만물을 다 같아 아울러 감싸서 그 어떤 사람만을 아껴주거나 도와 주는 일이 없으면 이것을 두고 일정한 넓이가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만물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이니, 어느 것이 못하고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어 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위치가 없다. 늙어 가는 나이는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출 수가 없다. 생성소멸과 찼다가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뜻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인 것이다.

물건의 생성은 말이 뛰거나 달리는 것처럼 변화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인위와 자연

황하의 신이 말했다.

“어째서 도가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理)에도 통달해 있고, 이에 통달한 사람은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에 밝다. 물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 밝은 사람은 사물에 의해 자신이 해를 받는 일이 없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불도 뜨겁게 하지 못하며, 물도 그를 빠져죽게 하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도 그를 해칠 수가 없고, 새나 짐승들도 그를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편안함과 위험을 살피고 화와 복 어느 것에나 안주하여 자기의 거취를 신중히 함으로써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의 내부에 존재하게 하고, 인위적인 것은 밖으로 내보내어, 그의 덕이 자연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의 행위에 대해 알고 자연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그의 올바른 위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아가고 물러나고 굽히고 뻗치고 자유자재로 되며, 도로 되돌아가 진리의 극치를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황하의 신이 물었다.

“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말했다.

“소나 말이 네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 말하고, 말의 머리에 고삐를 매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지혜로 천명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자기의 덕을 명성을 위해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을 지켜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다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는 발이 많은 지네를 부러워하고, 지네는 발 없이도 움직이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의지하는 데 없이 움직이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는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가지 않고도 아는 마음을 부러워한다.

기가 지네에게 말했다.

“나는 한발로 껑충껑충 뛰어다니지만 뜻대로 가지지 않습니다. 선생은 수많은 발을 쓰니 얼마나 편하십니까?”

지네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침 뱉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침을 뱉으면 큰 것은 구슬 같고 작은 것은 안개 같은데, 크고 작은 것이 섞여 떨어지는 그 수는 이루 다 알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지금 나는 그처럼 나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사용할 따름이어서 그렇게 편리한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네가 뱀에게 물었다.

“저는 많은 발로 다니고 있지만 선생의 발 없는 것만 못하니 어째서입니까?”

뱀이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기능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내 어찌 발을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뱀이 바람에게 물었다.

“저는 저의 척추와 갈비뼈를 움직여 다니고 있으니 의지하는 곳이 있는 셈입니다. 선생께서는 북해에서 일어나 남해로 불어 들어가는데도 의지하는 곳이 없으니 어째서입니까?”

바람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북해에서 일어나 남해로 불어 들어갑니다. 그러나 손가락도 나를 이겨고, 발길질도 나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나무를 꺾고 큰 지붕을 날려 보내는 것이 또한 나의 능력입니다. 작은 것은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큰 것은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크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운명과 시세를 믿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라

공자가 광이라는 곳에 갔을 때 송나라 사람들이 그를 몇 겹으로 포위하고 해치려 하였으나 공자는 쉬지 않고 금을 타며 노래를 했다.

자로가 들어와서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즐거우실 수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내가 이제껏 곤궁한 것을 싫어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운명일 것이다. 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지 오래 되었지만 그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시세(時勢)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에는 천하에 곤궁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걸왕과 주왕 시대에는 천하에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없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세가 마침 그랬던 것이다.

 물 속을 다니면서도 교룡이나 용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부들의 용기이다. 육지를 다니면서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들의 용기이다.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맞부딪치고 있어도 죽음을 삶과 같이 여기는 것은 열사들이 용기이다. 자기가 곤궁하여진 것은 운명임을 알고, 뜻대로 되자면 시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큰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용기이다. 자로야! 자리에 편히 앉거라. 나는 운명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무장한 군사를 이끄는 장수가 들어와 사과했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양호인 줄 알고 포위했었습니다. 이제 양호가 아닌 것을 알았으니 사과를 드리고 물러나려고 왔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

공손룡이 위모에게 물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옛 임금들의 도를 배웠고, 자라서는 어짊과 의로움으로 행동을 했습니다. 같고 다른 것들을 하나로 합하여 논하였고, 같은 돌에서 굳다는 개념과 희다는 개념을 둘로 분리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 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지혜를 곤경으로 몰아 넣었고, 여러 사람들의 언변을 궁지로 몰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지극히 통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말을 듣고 나서는 멍하니 정신이 없고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의 이론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저의 지혜가 그만 못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입을 열 수가 없습니다. 그의 도는 어떤 것입니까?”

공자 모가 책상에 기대어 크게 한숨을 짓고 하늘을 우러러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무너진 우물 안의 개구리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개구리가 어느 날 동해의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참 즐겁다. 우물가 위로 뛰어올라가 놀기도 하고, 깨어진 벽 틈으로 들어가 쉬기도 한다. 물로 들어가서는 양편 겨드랑이를 수면에 대고 턱을 물 위에 받치며, 진흙을 발로 차면 발등까지 밖에 빠지지 않는다.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를 둘러봐도 나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다 한 우물을 독점하고서 무너진 우물을 지배하는 즐거움 또한 최고이다. 당신도 한 번 들어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동해의 거북이 들어가 보려고 왼발을 넣기도 전에 오른편 무릎이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나와 개구리에게 바다 얘기를 했습니다.

「천리의 먼 거리로도 바다를 크기를 표현하기에 부족하고, 천 길의 높이로도 바다의 깊이를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우 임금 때 십 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큰 장마가 졌지만 바다의 물은 불어나지 않았고, 탕 임금 때 팔 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지만 바다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이 짧고 긴 것에 따라 변화하는 법이 없으며,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줄고 늘지 않는 것이 바다의 즐거움이다.」

그 얘기를 듣고 우물안 개구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멍하니 정신을 잃어 버렸다 합니다.”


  자연스럽게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위모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지혜란 옳고 그름의 한계조차 모를 정도인데 장자의 말을 이해하려 하고 있으니, 그것은 마치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고, 노래기에게 황하를 건너게 하는 것과 같아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오묘한 말을 논할 정도가 못 되면서도 스스로 일시적인 궤변에 의한 이익이나 추구하는 것은 무너진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지 않습니까?

장자는 황천을 내리 밟고 하늘로 올라가 남쪽도 없고 북쪽도 없이 질펀히 사방으로 퍼져서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달하여 있고, 동쪽도 없고 서쪽도 없이 아득한 우주의 근본에서 시작하여 위대한 도로 되돌아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멍청히 관찰로 이해하고 변론으로 추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는 대롱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과 땅의 넓이를 살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작은 소견입니까.

당신은 수릉의 젊은이가 한단으로 가서 걸음걸이를 배웠던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배우기도 전에 옛날의 걸음걸이마져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어서 돌아왔다 합니다. 지금 당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의 옛 마음마저 잊을 것이고, 당신의 옛 직업도 잃을 것입니다.”

공손룡은 이 말을 듣자 입은 열린 채 닫혀지지 않았고, 혀는 말려 올라간 채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돌려 달아나고 말았다.


  진흙탕에 꼬리를 끌고 다닐지언정...

장자가 복수 근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을 때, 초나라 임금이 대부 두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번거롭겠지만 나라의 정치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듣건대,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삼천 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 위에 그것을 보관한다 합니다.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아 존귀하게 되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겠습니까?”

두 대부가 대답했다.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려 할 것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그러면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려는 것입니다.”


  썩은 쥐는 먹지 않는다

혜자가 양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다.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장자가 오는 것은 선생님 대신 이 나라 재상이 되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혜자는 놀라 사람들을 시켜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장자의 행방을 찾게 했다.

그 뒤에 장자가 찾아와 만나서 얘기했다.

“남방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원추라 부른다. 당신도 그 새를 알고 있는가? 원추라는 새는 남해에서 출발하면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솔개가 썩은 쥐를 갖고 있다가, 원추가 날아오자 자기 것을 빼앗을까봐 깩 소리를 내며 놀랐다고 한다. 지금 당신은 양나라 때문에 나를 보고 깩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인가?”


  남의 감정을 안다는 것은..

장자가 혜자와 더불어 호수가 둑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장자가 말했다.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 거야.”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것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네.”

장자가 말했다.

“얘기를 그 근본으로 되돌려 보세. 자네가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고 물었던 것은,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네. 그래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데, 나는 호수가에서 물고기와 일체가 되어 그들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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