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칼럼] ‘착한 우리’에 대한 환상 깨기
한겨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근대 동아시아의 위대한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폭군을 폭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폭군 이외에 노예들을 노예라고 부르는 일도 심히 위험한 일이다.”

무슨 의미인가? 전통사회에서는 지식인의 가장 위험한 과제는 ‘권력자에게 진실 말하기’였다. 폭군에게 “폭군!”이라고 외쳤다가 귀양 보내져서 쓸쓸하게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 바른소리 한다는 것은 예전과 같은 의미는 없다. 일면으로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당국자들에게, 혹은 당국자들에 대한 바른소리를 하다가 ‘큰코다칠’ 위험성도 줄어들었고, 또 일면으로는 별다른 효과도 더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오늘의 극도로 냉소적인 지배자들은 진실을 몰라서 엉뚱한 일들을 벌이는 것도 전혀 아니다. 과연 ‘4대강 죽이기’를 밀어붙이는 이들은 이 프로젝트가 친환경적이고 차후 수익성이 높다는 걸 스스로 믿기라도 하겠는가? 알 것을 다 알면서도 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둘째, 지배자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도 극도로 냉소적이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다수의 유권자들은 과연 그를 ‘도덕군자’라고 믿고 뽑은 것인가? 알 것 다 알면서도 그가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한 줄의 희망 때문에 표를 던졌을 뿐이다. 권력자들도 오로지 당장의 사리사욕을 좇고, 대중들도 ‘성공’만 한다면 파렴치한 모리배를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볼 준비가 다 돼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의 직간(直諫)이나 권력자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도덕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은, 모리배들이 매체를 통해 유포하는 환상에 넘어가고 마는 대중들에게 혹은 대중들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와 달리 대중은 정치화돼 있으며 당당한 정치행위자로서 등장해 있는 상태니까 바른말의 효과는 어쩌면 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높다. 달콤한 거짓말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바른말이 늘 소화 못할 정도로 쓴맛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발자 북한에 대해서 우리가 방어하고 있으며 정당한 응징을 할 권리가 있다”는 권력자들의 말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다른 각도에서 남북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다면 그 반발은 대단할 수도 있다.

남한 입장과 거리를 두어서 말하자면, 전 정권이 북한에 한 약속들을 무단 취소하고, 나아가서 미국과 ‘북한 붕괴’의 경우 북한 영토를 그 주민의 의사와 아랑곳없이 흡수할 일을 의논하는 당국자들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못하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야말로 넓은 의미에서 도발자다.

‘나’ 자신이 속하는 ‘우리’야말로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은 늘 마음 아프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누구에 게나 소속 집단을 긍정함으로써 자기확인을 하려는 욕망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소속돼 있는 악덕업자들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이하의 박봉을 주면서 착취만 일삼았다가 결국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발한 판에 ‘우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본다는 것은 단순히 어리석음만은 아니고 ‘우리’와 같은 국적을 갖고 있는 착취자들의 국제적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한다. 실제 일개 국제적 야수일 뿐인 ‘우리’ 국민국가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들을 피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들도 자본 노예의 위치에 지속적으로 안주할 것이다.

비록 듣기 싫고 마음 아픈 이야기라 해도, 이윤만 알고 정의를 모르는 국가인 대한민국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경쟁과 착취에 길들여진 유순한 노예인 우리들의 실제적 상황에 대한 바른말이 대중화돼야 노예 상태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56820.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