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의 최후

독일의 역사철학자 헤겔은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결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는 한 번 빠진 곳에 다시 빠지지 않는다 하는데,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갖고도 끊임없이 질곡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욕망과 어리석음의 관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역사를 공부하고 과거를 탐색합니다.
그 행위는 인간이 좀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물음은 오래되고 심오한 주제인데,
그러냐 아니냐는 대답과 상관없이 역사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자체가
무언가 배우고 바뀌려는 의지, 발전의 방향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고고학이나 역사학은 케케묵은 과거를 캐는 학문이 아닌
미래를 위한 학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비극이 떠오르곤 합니다.

이스터섬은 엄청나게 큰 모아이라는 석상들이 있는 신비의 섬으로 유명합니다.
도저히 옛날의 기술력으로는 세울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거대 석상들이
그 외딴 섬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고
외계문명의 흔적이라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그보다 이스터섬은 무절제한 토목공사가 어떤 비극을 부르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로써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이스터섬은 아주 작고 외진 섬으로
숲이 울창하고 동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는 풍요로운 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숲의 나무를 활용하여 집을 짓고 카누를 만들어 낚시를 다니고
숲의 동물들을 사냥하며, 자신의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그 작은 섬에 만 명이 넘는 인구가 번성했다고도 합니다.

이스터섬에도 몇 개의 부족이 나누어져 있었고,
부족마다 부족장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위정자들의 어리석은 행위가 섬을 망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기 부족의 세 과시를 위해 모아이 석상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석상을 건설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위세를 떨치고 싶어합니다.

이 경쟁은 점점 심해지고 위정자들은 무리한 건설사업에 계속 열을 올립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었다! 위대한 지도자인 이 내가!' 아마도 이런 아상에 사로잡혀
점점 부족민의 고통이나 자원 고갈등은 보이지 않게 된 것이겠지요.

아시다시피 건설사업은 많은 노동력과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현대의 기술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석상 건설을 사람 힘으로만 해내려면
우선 그 노동력을 먹일 식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 돌을 옮기거나 석상을 조각하러 올라갈 나무 받침대 등을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나무를 베어야 합니다.

또 인력으로만 그 엄청난 일을 해내려니 사람들을 착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모아이 건설이 시작되며 이스터섬에서는 숲이 사라지고 동물들이 사라졌습니다.
사냥할 식량이 줄고 맨땅이 드러나고 토양은 유실되어 농사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런데도 부족민들은 위정자들의 세 과시에 동원되어 계속 착취당합니다.

섬이 거의 파국으로 치닫던 때까지도,
섬 권력자들은 다른 섬에서 수입해온 진귀한 새 깃털로 만든 사치품들을 향유하며
호사스런 생활을 즐겼다고 합니다.

부족민들의 식량 사정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초기에는 집터 인근에서
먹고 버린 다양한 큰 동물과 생선의 뼈가 발견되었지만,
후대에는 그런 먹거리의 흔적은 사라지고,
먹을 것이 없어 쥐까지 잡아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낚시용 카누를 만들 나무까지 모두 토목공사에 낭비해버려
바다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정자의 세 과시를 위한 무리한 토목공사는 섬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식량사정이 나빠지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폭동과 갈등이 섬을 뒤덮습니다.

너무나 끔찍하게도 그 파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쯤,
이스터섬에는 식인 풍습까지 나타났던 걸로 추정된다 합니다.

작지만 풍요로운 생태계와 많은 인구를 자랑하던 이스터섬은,
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었을 무렵에는
비참하게 굶주리고 볼품 없는 소수만이 남은 황폐한 섬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무리하게 추진한 토목공사로 인해 문명 자체가 붕괴해버린 예는 많습니다.
이스터섬은 그 가장 생생한 예입니다.

아상에 사로잡힌 위정자가 한정된 자원이나 백성들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치적을 과시하려는 욕망에 빠질 때,
그 사회 전체가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을 역사는 생생히 보여줍니다.

물론 이스터섬은, 역사적 경험을 문자로 기록하여 교훈삼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운명을 피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고고학적 경험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과연 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21세기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건설과 토목의 광풍이 불고 있습니다.

엄청난 건설비, 유지비용이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관청들을
혈세를 쏟아부어 경쟁적으로 건설했습니다.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현장의 근로자들을 무리하게 다그쳐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럼에도 자연에도 사람에도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강 파헤치기가
전 국토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는 것인지 수도 서울에서는
경제적 타당성이 무척 의심스러운 뱃길사업을 기어이 강행하겠다 합니다.

이미 수십억씩 세금을 쏟아부은 수상택시나 버스 등 한강 물길관련 사업이
완전히 적자이고 세금낭비임이 드러난 마당에도 말입니다.

여기저기에 뉴타운이다 재개발이다 마구잡이로 개발 계획을 시행해
원주민들은 쫓겨나고 남은 사람들도 고통을 받습니다.
탐욕의 거품이 꺼지자 오도가도 못하는 엉터리 개발 계획에
흉물스럽게 파헤치고 부순 자리들만 무수합니다.

엄청난 돈을 혈세로 지원하여 한강에 인공섬을 만들고 시민들의 출입은 금한 채
외국에서는 야만적이라 비난받는 모피 패션쇼를 엽니다.

고유가로, 지구 온난화로 전력 사용 자제를 외치면서도,
가정용 전기요금을 올릴지언정 청계천에는 전기를 쏟아부어 물을 돌리고
서울의 야경은 화려한 불빛으로 한껏 치장해댑니다.

우리나라의 온난화와 주변 해수온도 상승속도가 세계 최고인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을 외치니
참으로 이스터섬 모아이 석상이 웃을 일입니다.

대규모 건설사업이야말로 가장 많은 화석 연료를 소비하며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사업이라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수백년전 이스터섬에도, 비슷한 운명으로 몰락해버린 다른 문명들에서도
위정자의 잘못된 치적 과시에 반대하는 주민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삶을 위협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정자들로부터 감시와 사찰을 당하거나 일터를 빼앗겼을 수도 있겠지요.
혹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다수 섬 주민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몰락한 문명의 권력층은 진귀한 새 깃으로 만든 사치품들을 향유하며
권력 놀음을 즐겼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종교적 심성이 강했던 고대 사회이니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신의 뜻을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모아이 석상을 통해 우리 섬을 하늘에 봉헌한다고 말입니다.

착취당하고 힘들어하는 섬 주민들의 앞에서 거대한 모아이를 가리키며
우리는 선진부족이다, 이로써 우리 부족의 족격이 높아졌다고
자화자찬을 해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헤겔이 지적한 인간의 어리석음.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을 벗어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어리석음과 탐욕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고
몇몇의 강한 탐욕은 다수의 침묵 속에 사회 전체를 전염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완치가 힘들어도 항암치료를 포기하지 않는 것과,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리는 것은
그 결과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힘들어도 항암치료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100% 죽음 뿐입니다.

늘 역사를 생각합시다.

지긋지긋한 어리석음이 무수히 반복될지라도,
그것을 똑바로 보는 일조차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거의 궤적을 따라 걸어온 이 길에,
과연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있는지 늘 냉정히 살피고 관찰합시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명진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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