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년 6월 7일, 한 천재 수학자가 자신의 자택에서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를 해독하는 기계를 만든 전쟁 영웅이자, 20대에 현대 컴퓨터의 논리적 모형을 착안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수학자, 앨런 튜링[Alan M. Turing, 1912~1954] -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튜링은 1911년, 아버지가 인도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영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결코 전형적인 모범생이 아니었지만, 수학과 과학만큼은 독자적인 철학을 정비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의 수학적 재능은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수리논리학'을 전공하면서 활짝 만개하여, 1936년에는 불과 25세의 나이로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문제의 응용에 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라 는 논문을 통해, '컴퓨터의 논리적 모형'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겨 당대 최고의 수학자 폰 노이만을 지도교수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함께 연구하자는 노이만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는 1946년, 17,468개의 진공관을 연결해서 만든 미국의 거대 계산기 '에니악[ENIAC]'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그보다 2년 앞선 1943년, 영국에서 콜로서스[Colossus]라는 계산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당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작업을 주도했던 인물이 튜링이었다. 이 기계는 난공불락으로 악명 높았던 독일의 견고한 암호,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하고자 영국의 일급 과학자들이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에 모여 비밀리에 완성된 것으로서, 197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덕분에 전쟁 막바지 무렵, 독일의 암호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연합국은 승리의 교두보가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11년도 작품 '에이 아이(AI)'를 볼까?
행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소년, 데이빗은 형 마틴이 불치병을 치료하고 돌아오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만다. 사실 그는 '감정을 가진 아이 로봇'으로, 친아들이 돌아온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된 데이빗은 피노키오처럼 자신도 인간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되찾으려는 희망을 품고 여행을 계속한다. 슬픔, 행복, 심지어 살고자 하는 욕망까지 느끼는 기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의 지능과 감성을 가진 기계, 즉 '인공지능' 개념은 1950년, 튜링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그는 학술지 '마인드'에 발표한 논문 '계산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튜링 테스트(Turing Test)'로 알려진 다음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을 제안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있고, 이와 격리된 다른 방에 '심판(혹은 질문자)'가 있다. 그는 두 사람을 볼 수 없으며, 채팅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 대답을 근거로 누가 여자이고, 누가 남자인지 맞춰야 한다. 이때 남자는 심판을 정답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반대로 여자는 심판이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럼, 동일한 조건에서 남자를 '컴퓨터'로 대체해 보자. 튜링은 만약 '컴퓨터가 첫 게임의 남자만큼 심판을 속이는 역할을 잘 수행'하여, 심판이 정답을 맞출 확률이 50% 미만이 된다면, 이러한 '지적인 컴퓨터'를 '인간과 동등한 심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두 개체(남자와 컴퓨터)의 '입출력'이 같다면, 그 둘은 동일한 심리적 지위를 가지며, 따라서 한 쪽(남자)이 심적 존재라면 다른 쪽(컴퓨터)도 심적 존재라는 논변이다. 물론 이 테스트는 의식을 가진 기계의 '능력'을 입증해 주는 것이지, 그러한 '존재' 자체를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그 러나 이는 단순한 차원이 아닌, 문화 예술 사고 감정 윤리 등 다방면에서 걸쳐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매우 풍부하고 폭넓은 테스트이기에, 이를 통과하는 것은 심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있다. 이렇게 촉발된 인공지능은 현재 컴퓨터 과학 분야의 다양한 기술과 결합하여 활발히 추진 중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튜링은 '인간관계에 서툰 괴짜'였으며, '외톨이'였고 또한 '동성애자'였다. 고등학생 시절 깊은 우정을 쌓았던 크리스토퍼 모컴이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때문에 그는 늘 의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근원적인 상실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모컴 이후 한번도 제대로 된 동성연인을 만나지 못했으며, 평범한 '이성애자'를 짝사랑하는 일이 반복되었기에 그의 외로움은 갈수록 커졌다.

1952년, 튜링은 거리에서 만나 잠시 사귀게 된 한 청년이 빌미가 되어 경찰에 기소된다. 죄목은 남자와의 추악한 외설 행위, 50년 전 오스카 와일드를 파멸시켰던 바로 그 혐의였다. 당시 보수적인 영국에서 '동성애'란, 건전한 사회를 파괴하는 '죄악'이었다. 이 '광기' 앞에서, 그가 2차 대전 승리에 기여한 점이나, 프로그래밍 기술에 혁신을 가져왔으며, 대영제국훈장을 받았고, 맨체스터 대학 컴퓨터연구소 부소장이자, 왕립학회회원이라는 지위는 무용지물이었다.

정부는 구속하지 않는 대신 화학적 거세에 해당하는 '에스트로겐요법'을 강요했다. 출국을 금지 당하고, 연구마저 제한 받은 상황에서, 주입 받은 여성호르몬 때문에 튜링의 젖가슴은 부풀어 올랐으며, 중추 신경계 역시 손상을 입었다. 모멸감 속에서 깊은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치사량의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자살하였다. 여성이 되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항거하고자, 고전적으로 가장 여성스러운 죽음인 '백설공주'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기계도 욕망과 기호,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 철학적으로 질문했던 사색가, 앨런 튜링 - 그가 선입견에 희생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흥미롭게도 '한 입 베어먹은 애플사 로고'가, (회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암시하고 있다는 추측이 무성하다.
Written by :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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