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라싸를 다녀와서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
다큐제작을 위해 티베트인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직접 살펴보고자 10월말 티베트 라싸를 다녀왔다.
등산과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티베트와 히말라야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푸른 하늘과 높은 산, 강렬한 햇빛,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풍경, 또 티베트인의 순진무구한 얼굴 표정은 아직까지도 마음에 오래 남아있다.
티베트는 해발 고도가 약 4000미터나 되므로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고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여건이 굉장히 열악하다.
티베트에서 죽음은 삶의 과정이고, 삶은 죽음의 과정이다.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 있다. 죽음은 육신이란 낡은 옷을 벗는 것에 불과하므로, 죽음으로 모든 게 끝이 아님을 누구나 확신하고 있다.
이는 티베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은 외면하고 삶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불경과 성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님을 곳곳에서 말하지만 그것은 경전의 말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죽음 이해의 차이는 삶의 이해와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에서는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죽음이 해결책이라도 되는 듯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살률 1위가 된 게 아닌가? 경제적으로 잘 사는 한국에서 자살이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티베트인들은 크게 놀란다. “조금 힘들다고 어떻게 자살할 수 있습니까?”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므로 삶의 고통은 자살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티베트인은 생각한다. 오히려 삶의 고통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혹은 축복으로 간주한다. 삶의 고통을 수용해야만 내세에는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만날 수 있으므로 삶의 고통으로 인해 자살로 뛰어드는 일은 없다.
이처럼 고통 인식이 우리와는 크게 다르므로 티베트인은 스트레스, 우울증, 자살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다. 티베트인들은 현실에 크게 절망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에 눈을 감기보다 상처를 감내한다. 부정적인 경험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알고 축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사회는 죽음 이해가 크게 부족하므로 세속적인 가치에 함몰되는 일이 많다. 세속적인 성취를 전부로 알지만 세속적인 것은 죽을 때 다 두고 떠나는 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세상일에만 탐닉하니까 임종 순간을 여유 있게 맞지 못하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닐까?
티베트 특유의 자연 환경과 죽음 이해가 잘 드러나 있는 현상이 바로 천장(天葬)이다. 사람이 죽고 영혼이 시신에서 분리되면 시신을 메고 독수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천장터로 간다. 천장사가 시신을 해체하면 독수리들이 몰려들어 시신을 먹는다.
뼈가 남으면 빻아서 보릿가루에 묻혀 다시 독수리에게 준다. 티베트에는 나무를 구하기 힘들어 화장은 생각하기 어렵다. 고산 지대라 산소가 희박해 매장을 하면 시신이 썩지 않으므로 매장도 불가능하다.
천장은 티베트의 자연 환경과 죽음 이해에 알맞은 시신 처리 방식이다. 또 티베트인들은 살아 생전에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야크라는 짐승의 고기를 먹었으므로 죽으면 천장을 통해 시신을 짐승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어느날 라싸 인근 삼예사 조장(鳥葬)터를 방문했더니, 청해성(靑海省)에서 3일 동안 버스를 타고 그곳을 찾은 30대 아빠, 엄마, 조카, 5살짜리 아들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천장(天葬)터에 순서대로 잠깐씩 누웠다.
왜 천장터에 누워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죽으면 그곳에 누워 조장을 지낼 것이라고 했다. 천장을 지내는 것은 우리의 명예라고 티베트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답한다. 천장터 순례를 통해 죽음 준비와 함께 삶을 제대로 영위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는 삶의 준비를 티베트인은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