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의 고사를 시조작품으로 노래한 것이다.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 비극 시인이다.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 이름 평(平). 원 자.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졌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 ? 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이런 굴원의 고사를 통해 충직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시조 뿐 아니라 고전 시가의 소재에 있어서 공통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충성심과 절개를 이러한 공통적인 소재를 직접적인 시적 제재로 사용하고 있다.
-조규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