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金正喜)의 천재성은 모진 시련 속에서 한층 빛을 냈다. 그는 생애의 시련기에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당시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인데, 김정희와 풍양 조씨 조인영(趙寅永)과 영의정을 역임한 권돈인(權敦仁)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당연히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 결과로 김정희는 두 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김정희의 추사체(秋史體)는 1840년부터 1848년 까지 8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글씨체이다. 청나라 학자들이 이상으로 삼았으되 미쳐 이루어 내지 못한 서체로 평가받은 추사체가 아닌가. 기후 풍토가 척박한 유배지의 외롭고 고달픈 유배생활 중에 추사체를 완성하여 조선 서예사의 한 장을 완결한 것이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조선 학계와 예술계의 수준이 김정희와 같은 천재 탄생의 배토가 되었겠으나, 그 천재는 천재를 도야하기 위한 고통의 세월과 역경을 뛰어넘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말에 활동한 북학 계열의 많은 인재는 그의 제자이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추사의 문하에 삼천 명의 선비가 있다(秋史門下三千士)’라는 시 구절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여 중인 출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 중 이상적(李尙迪)은 제주에 귀양 사는 김정희와 청나라의 지식인들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상적은 시문에 능한 당대 최고의 통역관으로 열두 차례나 연행하면서 귀중한 책을 구입하여 제주도의 스승에게 보냄으로써 스승의 학문 정진에 이바지했다. 또한 그는 글씨 연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청나라의 금석문 자료를 입수하여 스승에게 전하고 스승의 글씨를 청의 예원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멀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 제주도에까지 스승을 찾아뵈었다.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는 김정희가 1844년(현종 10년)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그려준 그림이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있음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공자의 명언을 주제로 삼아 겨울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황한(荒寒)과 적막(寂寞) 속에 네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 있고, 그 사아에 초옥 한 채가 인적 없이 들어 앉아 있다. 그 이외에는 텅 빈 공간이다. 거기에는 쓸쓸함과 비움의 미학이 있고, 추사의 심정이 살아 있다.

전통 시대 선비는 벼슬길에 나가 사대부라는 학자 관료의 길을 가다가 뜻에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사직하고 다시 선비의 위치로 돌아갔고, 귀양사리를 하더라도 세속에 얽매어 소홀히 했던 학문 연마에 몰두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취지는 뒤에 붙은 소서(小序)에 잘 나타나 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하였으니, 그대의 정의야 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가 아닐까. “

이 한 폭의 그림에는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전통 시대 지성들의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고, 한 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그림과 글씨의 어우러짐이 있고, 사대부 스승에서 중인 출신 제자에게 계승되는 문화의 흐름이 암시되고 있어서 보면 볼수록 감개무량해진다.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과 글씨는 서권기(書卷氣, 책에서 나오는 기운)나 문자향(文字香, 글자에서 나오는 향기)으로 상징되는 치열한 수련과 작가 정신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한 사무친 고독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안동 김문의 김정희에 대한 의구심과 견제는 계속 되었다. 김정희는 8년간의 제주도 유배에서 방면되어 온 지 불과 3년 만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남북의 원악지(遠惡地)에만 유배당하는 쓰라림을 맛본 것이다. (.....)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운 북쪽 변방으로 가라는 것은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나 김정희의 정신력은 그 고통을 이겨 냈다. 그리고 1년 만에 돌아와 과천에 은거하다가 1856년 71 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세한도의 소장자(손창근)의 글이 있어 그 후의 세한도의 소유권 흐름을 알아보고자 해당부분을 역시 다음에 발취한다. (.....)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 센티에 가로 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 않은 크기지만 여러 사람의 발문(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 글)이 붙어 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 미터에 이른다. (두루마리 식)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 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 것이 전부이다. (.....)

이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이듬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 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 간의 깊은 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 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 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읊으며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 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쓰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후, 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9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쓰가를 여러 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 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가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한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 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에 추사가 상적에게 보낸 편지 - “세한도를 그리며“의 내용을 살펴보자.


오늘도 시간이 내 처소를

늙은 개 마냥 쩔뚝이며 느리게 지나간다네.

낮에는 구름이 걸린 소나무를 쳐다보았다네.

문득 손끝에 잡히는 수염이 하도 길어

허름한 종이를 깔고

녹슨 가위를 숫돌에 갈아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다네.

종이 위로 내 꿈이 솔잎처럼 쏟아져 내렸다네.

내 남루한 꿈으로 노송 한 그루 그렸다네.

상적 잘 지내시는가.

자네가 보내준 책 잘 읽고 있다네.

북경에서 어렵사리 구한 책을 보니

자네의 따뜻한 마음씨가

부드럽고 향긋한 먹내처럼

내 가슴에 파고든다네.

오늘은 바다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네.

수많은 손과 발로 게처럼 부지런히 몰려드는 파도는

나에겐 형벌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네.

이제는 너무 들추어 낡아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써 본다네.

눈물 젖은 환한 한양의 밤을 떠올려 본다네.

자네도 제주 이곳에 와보면

와서 눈이 내리는 겨울 바다를 보면

바다와 권력이 닮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육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저렇듯 끊임없이 몰려들어 스스로를 부셔져 내리는 파도를 보면

조정 신하들이 쥐새끼 같은 낯으로 붉고 푸르게 차려 입고

왕궁으로 몰려들어 자손만세 영화를 꿈꾸는

그 권력의 허망함을 생각하게 된다네.

그래서 제주의 바람에는 꿈의 입자들이 묻어 있다네.

제주의 바람은 증폭되는 야망의 전조가 묻어 있다네.

아직도 내가 나를 놓아주지 못하는 증거라네.

오늘은 제주의 젊은 유생들과

실학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였다네.

나라 안은 천주교 문제로 골치를 썩는다지만

아직 이곳은 조용하다네.

젊은이들과 학문을 논하고

나는 바닷가에 와 앉아 있다네.

이럴 때면 난 바다 속으로 난 사람의 길을 생각한다네.

내 유배의 꿈은 깊고 깊어

바다에도 길을 만들 것 같네.

내 꿈이 엄청나게 거대해져 천마가 되어

바다를 등에 업고

내 마음처럼 설레는 이 섬을

한양에 내려놓고 싶다네.

바다에 눈발이 녹아드는

이런 날 그대와 술 한 잔 기울이며

우리 바다가 되어봄은 어떤가.

오늘 저녁은 자네의 곧은 마음을 떠올리며

파도 소리에 허리가 휜 노송이나 한 그루 그려보려 한다네.

내 안의 아직은 혼탁한 피로 말일세.

옹이마다 바다의 상처가 엉겨 붙어 있다네.

유배의 아픈 꿈이 담겨 있다네.

내 처소에서 하룻밤을 지새보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의 발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혀가 되고 싶어진다네.

절대 고독의 품안에 안기면

눈과 귀가 꽃잎처럼 열려

짐승들과 바람과 바다의 언어를 알아듣게 된다네.

오늘처럼 내 마음에 태풍이 몰아치는 밤이면

바다가 내게 와서 나대신 울어주기도 한다네.

나는 소나무 안의 바다를 그리며

그 바다 안에 햇살처럼 번진

완벽한 조화의 힘을 찾아 순례자처럼 떠돈다네.

한양의 젖은 꿈들이 내 속눈썹을 적시며 밀려오고 있으이.

내가 그린 늙은 소나무들이 칼처럼 단단한

내 젊음의 정신을 안고

그대에게 날카롭게 손톱을 세우며 떠나간다네.

나도 한조각 마음으로 그대에게 흘러가고 싶다네.

노송 하나 다시 정갈하게 그려본다네.

사람은 사람 곁을 떠나서야

온기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인가 보네.

이곳은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곳

나의 처소에는 섬사람 몇이

산 짐승처럼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방문 앞에 말린 생선 두어 마라와

삶은 감자 바구니 놓아두곤 사라진다네.

그것들을 달밤에 책장을 넘기며 먹다보면

목에 온기가 가시처럼 걸려 눈물이 흐르곤 한다네.

따스한 사람의 온기에

내 몸은 아프게 달아올라 황금빛으로 빛나기도 한다네.

밤마다 나는 나의 꿈을 놓지 못하여

나는 내 마음에 가시를 키운다네.

내 정신이 아프다네.




다음은 “안사람에게” 쓴 편지이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했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아래 거름되라고 묻어 주었소.

동백이 불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내 마음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소.

문을 열고 어둠속을 바라보았소.

바다가 마당으로 몰려들어 나를 위로하려 하오.

섬에는 섬의 노래가 있으오.

내일은 잘 휘어진 노송 한 그루 만나러

가난한 산책을 오래도록 즐기려 하오.

바람이 차오.

건강 조심하오.


http://blog.yahoo.com/Thomasjorhee/articles/156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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