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종, 능란하게 중국 요리해 국익 챙긴 외교 달인
세종대왕 초상. 그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성공적인 실리외교 정책을 구사했다
한국인에게 세종은 특별한 임금이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던 성군(聖君)이자 조선왕조의 황금기를 연 현군(賢君)으로 추앙된다. 서울의 대표적 거리를 세종로라 이름 짓고, 얼마 전까지 최고액권이던 1만원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을 넣고, 최근에는 광화문 광장에 동상과 기념관을 세웠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역대 임금 가운데 세종만큼 중국에 저자세였던 왕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종은 명의 요구라면 거의 모든 것을 수용했다. 1429년 영락제(永樂帝)의 부음을 들었을 때 상복을 27일 동안이나 입었다. 신하들이 3일만 입어도 된다고 말렸지만 세종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27일을 고집했다.
조선은 보라매를 공물로 바치라는 명의 요구 때문에 고민했다. 매를 포획하는 것 자체가 힘든 데다 그것을 산 채로 북경까지 가져가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하들은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해 ‘적당히’ 하자고 건의했지만 세종은 달랐다.
“제후의 처지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명은 황제국이고 조선은 제후국이었다. 세종은 명을 ‘상국’으로 섬기기로 한 이상 성의를 다해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핏 보면 굴욕적이라고 할 정도로 명에 고분고분했지만, 세종은 분명 외교에도 달인이었다. 그것은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개척해 평안도와 함경도를 조선 영토로 확실히 명토 박은 것에서 드러난다. 명은 일찍부터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을 포섭하려 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명 태조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 건국 무렵 여진족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내륙까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은 여진족들을 어르며 북으로 밀어내는 정책을 썼다. 명은 격하게 반발했다. 사신을 보내 여진 부락들을 다독이고 조선을 견제했다.
세종은 명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점진적인 정책을 썼다. 이미 명에 복속한 여진 부족은 건드리지 않되, 조선에 우호적이거나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을 경우 과감하게 끌어들였다.
1437년(세종 19년)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여진 지도자 범찰(凡察)은 명의 정통제(正統帝)에게 “조선이 우리를 박해한다”고 호소했다. 정통제의 대답이 흥미롭다. “조선은 법도를 지켜 사대와 교린을 제대로 하는 나라니 그럴 리가 없다.” 세종의 허허실실(虛虛實實) 정책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천안함 사태 이후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원칙과 신뢰 속에서 명을 다독이며 국익을 챙겼던 세종의 외교적 수완과 지혜를 곰곰이 되새겨볼 시점이다.
2. 천대받은 세계적인 과학두뇌, 김감불과 김검동
일본이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을 이용해 은을 제련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아래는 일본인들이 조선 인삼 등 수입품 대금 결제용로 주로 쓰던 은 덩어리인 정은(丁銀). (사진 출처 :『江戶時代館』, 일본 쇼각칸 발행)
1503년(연산군 9) 조선에서는 세계 광업사상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다. 은광석에서 납(鉛)을 제거해 순은을 추출하는 제련기술이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를 둘러놓고 은광석을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불을 피워 녹이는 것이 핵심이었다.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회취법(灰吹法)이라 불렸던 그것은 당시로는 최첨단 제련술이었다.
기술 개발의 주인공은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掌隷院)의 노비 김검동(金儉同)이었다. 일찍부터 중국의 은 징색(徵索)에 시달렸던 데다 천한 신분의 인물들이 개발한 것이라서 그런지 조선에서는 이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16세기 중엽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조선 장인을 ‘스카우트’해 관련 기술을 일본으로 빼돌린다. 16세기 판 ‘첨단기술 유출’이었다.
당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아 재정 확보에 열을 올리던 일본의 다이묘(大名: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들은 경쟁적으로 이 기술을 활용했다. 전국적으로 은광 개발의 붐이 일었고, 16세기 후반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총량의 3분의 1을 점하는 수준까지 높아졌다. 조선 침략을 자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된 돈줄 또한 은광 개발이었음은 물론이다.
은광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아 곤혹스러운 처지로 내몰린다.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이 은을 화폐로 사용했던 데다 조선 정부에 은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명군 장병들은 월급을 은으로 받았고, 모든 거래를 은으로 했다.
그들이 민가에 나타나 은을 내밀며 술과 고기를 달라고 했을 때 조선 백성들은 손사래를 쳤다. 은을 이용한 거래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군 장졸들은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명군 장수들은 본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와 은을 채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부의 원천’인 은광 개발에 소극적인 조선 군신들을 질타했다. 조선 조정은 뒤늦게 은광 개발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된 기술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터라 관련 기술이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은은 오늘날의 달러처럼 세계의 기축통화였다. 무역을 통해 전 세계의 은을 흡수했던 중국과 은을 다량으로 캐냈던 일본이 번영했던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 조선은 첨단기술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징색에 대한 피해의식과 16세기 이후 심화된 장인에 대한 천대가 맞물려 빚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공계 푸대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한 오늘,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3. 사찰 때문에 군사훈련조차 못해 참패한 남이흥 장군
1627년(인조 5) 1월 21일 새벽, 청천강을 건넌 후금 군대는 안주성(安州城)을 공격했다. 호각을 불며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철기(鐵騎)라 불리는 수만의 기병이 밀려들었다. 성을 지키던 조선군은 대포와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
쓰러지는 적병도 많았지만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후금군은 사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성벽을 기어올랐다. 가공할 속도였다. 후금군이 입성하면서 승부는 결정되었다. 조선군은 그들의 창검에 속절없이 도륙되었다.
당시 안주성의 지휘관은 평안병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목사 김준(金俊)이었다. 두 사람은 영루(營樓)에 기대어 목이 터져라 싸움을 독려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후금군이 포위해 오자 두 사람은 화약 주머니에 불을 붙여 자폭한다. 장렬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폭사하기 직전, 남이흥이 남긴 유언이 폐부를 찌른다.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
습진이란 진을 치는 훈련을 말한다. 최전방 군사 지휘관이었던 남이흥은 어찌하여 습진을 한 번도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당시 횡행하던 기찰(譏察) 때문이었다. 기찰이란 오늘날로 치면 감시와 사찰(査察)을 가리킨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던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에도 전전긍긍했다. 광해군 추종 세력에 의해 ‘반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은 곳곳에 밀정들을 풀어놓았다.
과거 광해군 정권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자연히 밀고가 성행하고 그에 따른 옥사(獄事)가 빈발했다. 그런데 정작 적은 내부에 있었다. 반정 당시 공을 세웠던 이괄(李适)이 1624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신했다. 남이흥은 당시 서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괄의 난’ 이후 공신들은 기찰을 한층 강화했다. 어렵사리 되찾은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다.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평안도로 나가 있던 남이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수시로 찾아와 꼬치꼬치 캐묻는 정보원들 때문에 진 치는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훈련이 안 된 병력을 이끌고 철기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권을 지키기 위한 기찰 때문에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불신 풍조를 낳고 사회와 국가의 활력을 갉아먹는다. 며칠 전까지 집권당 내부에서 ‘사찰’ 운운하는 논란이 빚어졌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4. 임진왜란이 낳은 사연 … ‘동래 할미’의 기막힌 한평생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이 일본군에 의해 포위된 모습을 담은 ‘동래부순절도’. 동래 할미도 성이 함락 되면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육군박물관 소장).
이름 모를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원래 동래(東萊)의 창기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그녀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삼십대의 나이였다. 그녀는 십여 년 동안 일본에 억류됐다. 1606년 두 나라의 강화협상이 진척되면서 그녀는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귀환의 기쁨도 잠시뿐, 그녀는 다시 슬픔에 잠긴다. 전쟁 중에 헤어진 어머니 때문이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도 일본으로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모녀는 십여 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서로의 생사를 몰랐던 셈이다.
그녀는 친지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일본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구걸하며 전국 각지를 떠돌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마침내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이미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 정정했다. 모녀의 상봉 소식에 일본인들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모녀의 소문은 곧 일본 각지로 퍼져 나갔고 쇼군(將軍)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쇼군은 모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모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그녀는 언니와 함께 늙은 어머니를 업고 경상우도의 곳곳을 떠돌았다. 함안의 방목리(放牧里)란 곳에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녀가 기댈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다.
자매는 품팔이를 해서 생계를 꾸렸다. 그녀는 먹을 것이나 옷가지가 생기면 먼저 언니를 챙겼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렀고 그녀는 팔십이 넘어 생을 마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동래 할미’라고 불렀다.
허목(許穆)의 『기언(記言)』에 실린 ‘동래구(東萊嫗)’라는 글의 내용이다. 허목은 당시 전해지던 이 이야기를 선행(善行)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록했다. 그러면서 “동래 할미가 남자도 감히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해서 오랑캐를 감화시켰다”고 찬양했다.
전쟁 때문에 이산과 귀환을 거듭하며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동래 할미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읽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서글픈 디아스포라의 사례가 어디 동래 할미뿐이던가. 당장 사할린의 한인들이 떠오른다.
일본은 수많은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끌고 가 죽도록 부려먹었다. 그러고는 패전과 함께 그들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와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그들의 귀환 열망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강제로 병합된 지 100년이 된 오늘, 이제는 그들이 흘리는 이산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최소한 동래 할미 모녀의 상봉 장면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던 측은지심을 회복해야 한다.
5. 일본·명에서 첨단 무기와 기술 빼내려 애썼던 류성룡
포르투갈을 통해 명나라에 들어간 불랑기포(사진 위)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도 전해졌다. 15세기 말 유럽에서 처음 제작된 조총(사진 아래)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 일본 사신이 선조에게 조총을 진상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은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사장시켰다
1543년 일본 규슈 남쪽의 다네가시마(種子島)란 섬에 중국 선박 한 척이 표착했다. 배에는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다. 그는 다네가시마 영주에게 소총 한 자루를 선물했다. 뎃포(鐵砲)라 불렸던 조총(鳥銃)이 일본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조총은 곧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침 일본은 중앙의 막부 정권이 힘을 잃고 지방의 영주들이 패권 경쟁을 벌이던 전국(戰國)시대를 맞고 있었다. 패권을 열망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확보하고 활용하는 데 특히 열심이었다.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대승을 거두어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나가시노 전투는 조총을 중시했던 노부나가가 상대적으로 그것을 경시했던 가쓰요리를 압도했던 싸움이었다. 말하자면 뎃포와 무뎃포(無鐵砲)의 대결에서 ‘무뎃포’가 참패했던 전투이기도 했다.
이윽고 뎃포와 무뎃포의 대결은 1592년 조선에서 재현되었다. 임진왜란 초반 조선 육군은 조총의 위력 앞에서 혼비백산했다. 개전한 지 불과 17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가 피란길에 오르는 치욕을 겪었다.
조선 육군이 조총에 맞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은 명군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서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를 비롯한 다양한 화포를 발사하여 일본군의 넋을 빼놓았다. 화포의 위력에 눌린 일본군은 평양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체찰사로서 조선군을 지휘했던 류성룡(柳成龍)은 조총과 화포를 확보하고 관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사로잡거나 투항해 온 일본군을 통해 조총 관련 기술을 익히고 명군 장수들을 통해 화포와 화약 기술을 습득하려고 했다.
또 훈련도감을 만들어 전문 화기수를 육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포와 화약 관련 기예를 습득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명군은 화포나 염초(화약 원료) 제조법이 유출되는 것을 집요하게 막으려 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람을 보내 조선 각지에 남아 있던 화기들을 일일이 회수해 갔다.
오늘날에도 강대국들은 첨단 무기나 관련 기술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면 스스로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 근래 우리나라도 제법 다양한 무기들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자체 개발한 ‘명품 무기’라고 자랑했던 K-1 전차, K-21 장갑차, K-9 자주포 등의 결함이 줄줄이 드러나 빈축을 사고 있다. ‘명품’을 개발했다고 자랑하기에 앞서 개발 이후 성능과 품질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했는지부터 철저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6. 조선에 큰 업적 남긴 귀화 외국인, 이지란과 설장수
고려 말 조선 초의 장군 이지란(1331~1402)의 초상화.
흔히 ‘퉁두란’으로 알려진 그는 여진족 출신으로 조선왕조 개국과 국방체제 정비 과정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다(경기도 박물관 소장).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선조들의 행적은 이채롭다. 13세기 중반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본향인 전주를 떠나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두만강 하류의 알동(斡東)으로 이주했다. 증조부 이행리(李行里)는 다시 함경도 영흥 부근으로 거처를 옮긴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며 북방을 누비는 과정에서 이씨 집안은 이 지역에 세거했던 몽골·여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고려 말 동북면 일대에서 활약했던 이성계의 주변에는 많은 여진족 유력자들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바로 이지란(李之蘭)이다. 북청(北靑) 부근에 살던 여진족으로 본래 성은 동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였다.
말 잘 타고 활 잘 쏘았던 이성계가 역시 기마와 궁술에 뛰어났던 그를 만나 의형제를 맺은 것은 행운이었다. 이지란은 이후 중요한 고비마다 이성계를 지성으로 보좌한다.
“여인이 이고 가는 물동이에 이성계가 쇠구슬을 던져 구멍을 내니 이지란이 진흙덩이를 던져 구멍을 메우고 물이 새는 것을 막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실제 전장에서도 재현된다. 1380년(우왕 6) 이성계와 이지란은 남원의 황산(荒山)에 침입한 왜구 토벌전에 출전한다.
왜구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고려군은 두 사람의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 덕분에 승리를 거둔다. 이성계가 적장 아기발도의 황금빛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자 이지란은 노출된 얼굴을 명중시켜 역전승을 이끌어낸다.
황산전투 승리를 계기로 이성계는 거국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입신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지란은 이성계가 자만할까 경계하여 그에게 “재주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1392년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개국공신에 오른 이지란의 활약은 더욱 빛난다. 경상도로 내려가 왜구를 막는 대책을 마련하는가 하면 함경도에서는 여진인들을 다독여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훗날 이식(李植)은 “이지란이 태조를 보좌하여 남쪽과 북쪽 지방을 평정할 때 세운 공적은 삼한(三韓)을 뒤덮는다”고 찬양했다.
태조대에 활약한 이민족 출신 인물로는 설장수(<5070>長壽)도 눈에 띈다. 건국 직후 명과의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한 그는 본래 회골(위구르) 출신이었다. 이들을 포용하여 공을 세우도록 이끌었던 이성계의 혜안이 돋보인다. 16세기 이후 여진족을 ‘오랑캐’로 백안시하여 결국 국가적 위기를 불렀던 상황을 돌아보면 더욱 그러하다.
바야흐로 국내 거주 외국인이 100만 명을 훌쩍 넘고 ‘다문화가정’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순혈주의’에 매달려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다문화 사회를 포용하면서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7. 이순신 장군은 ‘대양 해군’의 선구자였다
이순신은 국가적 추모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무속신앙에서도 화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영험 있는 신(神)으로 숭배되었다. 과거 충남 홍성군에서 무당들이 신으로 모셨던 이순신의 모습. ‘사해(四海)대왕’이자 ‘장군신’으로 묘사돼 있다(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1592년 조선으로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통보받았을 때 명나라가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해방(海防) 강화였다. 톈진(天津)·산둥(山東)·뤼순(旅順) 등 베이징(北京)에 인접한 해역의 방어 태세를 점검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왜구(倭寇)의 침략에 시달렸던 명은 일본 수군이 이들 지역에 출몰하는 상황을 몹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의 이순신 덕분이었다. 애초 일본군은 수륙병진(水陸竝進)을 기도했다. 부산에 상륙한 육군이 세 길로 북상하고 수군이 서해로 진입하면 몇 개월 안에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실제 일본 수군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압록강을 통해 의주로 진입하는 순간 ‘게임’은 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수군이 서해로 들어오면 산둥반도나 발해만을 통해 베이징과 톈진 등 명의 심장부를 공략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침략의 궁극적인 목표가 명 정복에 있었으니 명은 일본군의 서해 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전라도 연안을 거점으로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을 원천 봉쇄했다. 그것은 조선은 물론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낸 위업이었다. 명이 왜란 초반 조선에 육군을 파견하면서도 수군을 보내지 않은 것은 까닭이 있었다. 이순신의 맹활약이 거듭되면서 수군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597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참패했을 때 명은 화들짝 놀란다. 당장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입해 북상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열어 진린(陳璘)이 거느리는 함대를 조선에 파견한다. 백의종군 끝에 복귀한 이순신은 진린을 다독여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함대는 조선 방어에 그치지 않고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냈다. 이순신은 사실상 ‘동아시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의 수군이 보여준 역량과 활약은 오늘날 우리가 염원하는 ‘대양해군’의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섬의 영유권을 놓고 벌이는 중·일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그런데 한국 해군은 ‘대양해군’ 구호를 당분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천안함 사태의 후유증 때문이란다. 하지만 오로지 북한을 막는 수준에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미래의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 바닷길이 막히면 생존할 수 없는 나라에서 과연 옳은 자세일까? 문득 이순신 장군은 뭐라 하실지 궁금해진다.
8. 38년 만에 탈출한 포로 안단, 조선은 도로 청에 돌려보냈다
현재의 봉황성. 봉황성은 명·청 시대 단둥(丹東)에서 랴오양(遼陽)·선양(瀋陽)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청 시절에는 봉황성 장군이 주차하면서 조선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곳이다. 안단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 귀국했지만 의주에서 붙잡혀 도로 이곳으로 압송되었다.
병자호란이 남긴 상처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것이 포로 문제였다. 인조와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 서울과 경기도 주변에서는 ‘인간사냥’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최대 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청군에 사로잡혔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은 유별났다. 그들은 포로를 ‘목숨을 걸고 획득한 정당한 성과’로 여겼다. 1637년 1월, 청 태종은 포로들을 심양(瀋陽·선양)으로 끌고 가기 직전 인조에게 다짐을 받아낸다.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청나라 땅을 밟은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는 포로는 그대가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같은 해 4월 이후 청을 탈출해 오는 포로들이 줄을 이었다. 낮에는 산속에 숨었다가 밤에 주로 움직였다. 감시와 체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신만고 끝에 압록강변까지 왔을 때 그들은 실망했다. 청의 감시를 의식한 지방관들이 도강(渡江)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국을 거부당한 포로들은 강 상류로 올라간다. 수심이 얕고 감시가 덜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중에 굶주려 쓰러지고, 맹수에게 희생되고, 끝내는 절망해 목을 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압록강 상류 지역에 백골이 즐비하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조정은 청 측에 몸값을 치르고 포로를 데려오는 속환(贖還) 작업을 본격화한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값이 은 수십 냥에 이를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왕실과 고관들, 부유한 집안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일부 고관이나 부유층들은 자기 혈육을 우선 송환하려는 욕심에 협정가보다 훨씬 많은 은을 싸 들고 심양으로 갔다. 자연히 몸값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수많은 포로들이 이역에서 죽거나 잊혀져 갔다.
1675년(숙종 1), 안단(安端)이란 사람이 탈출해 왔다. 38년 만의 귀환이었다. 애초 심양으로 잡혀가 청인의 종이 되고 끝내는 북경(北京·베이징)까지 흘러들었던 기구한 인생이었다. 1674년 주인이 실종되자 탈출을 감행했다.
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 벌판을 가로지르며 수많은 사선을 넘었다. 하지만 의주까지 왔을 때 의주부윤은 그를 묶어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 버린다. 청의 힐책을 의식한 조처였다.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간절한데 왜 나를 죽을 곳으로 보내느냐”며 절규한다. 이후 그의 소식은 끊긴다.
60년 만에 탈북에 성공한 국군 포로가 중국에 있다고 한다. 여든넷의 고령인 그의 편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고향이 그리워 60년을 흐느껴 울며 살았다”는 그의 슬픔은 안단과 너무 닮았다. 그의 귀환 열망을 실현시켜 주어야 한다.
9. 박연, 하멜, 그리고 미우라 안진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난파선에서 내려 상륙하는 장면. 하멜 일행은 애초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이 장면은 하멜이 조선 탈출 이후에 썼던 『조선유수기』에 실려 있다
1653년(효종 4) 8월 제주도에 표착(漂着)했던 하멜 일행은 제주목사에게 “목적지인 일본의 나가사키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윽고 10월 29일, 그들은 붉은 수염을 가진 중년의 사내와 조우한다. 얀센 벨테브레. 그 또한 네덜란드 출신의 ‘오랑캐’였다. 1627년(인조 5), 일본으로 항해 도중 물을 구하려 잠시 상륙했다가 26년째 붙잡혀 있던 억세게 운 없는 인물이었다. 이름도 아예 박연(朴燕, 朴淵)으로 고쳤던 그는 하멜 일행의 ‘사연’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돼 왔다.
뜻밖에 동포를 만난 기쁨도 잠시, 하멜 일행은 박연의 더듬거리는 화란어를 듣고는 절망에 빠진다. “이 나라는 일단 들어온 외국인은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다.” 결국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속된다. 화포를 잘 다루는 재주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1655년 3월,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청나라 사신 행렬 앞으로 두 사람이 뛰어든다. 조선 조정을 압박해 자신들을 나가사키로 보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 청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조정은 두 사람을 투옥하고 남은 자들을 전원 전라도로 귀양 보냈다. 청 사신들과의 조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조처였다.
하멜 일행은 이후 11년 이상 전라도 각지에 억류됐다. 그 세월 동안 멍석을 짜고, 진흙을 이기고, 잡초를 뽑는 등의 노역을 해야만 했다. 항해술 등에 밝고 화기도 잘 다루던 일급 기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생활이 고달파질수록 탈출 의지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1666년(현종 7) 9월, 하멜 일행 여덟 명은 몰래 마련한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한다. 조선은 과연 이 진객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하멜 일행보다 53년 빠른 1600년, 네덜란드 선박 리프데호가 일본의 분고(豊後) 앞 바다에 표착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배의 1등 항해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를 외교 고문으로 임명하고 영지와 노비를 후하게 하사한다. 감격한 애덤스는 일본에 귀화해 이름도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으로 바꾼다.
그는 서양 정세를 자문하는 것은 물론, 무역선을 이끌고 각지를 다니며 1609년 일본과 네덜란드가 국교를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얼마 후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에 설치된 네덜란드의 상관은 일본이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서양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도 어렵사리 초빙한 외국인 전문 인력들이 줄줄이 한국을 떠난다는 소식이다. 청을 의식해 하멜 일행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조선과 윌리엄 애덤스의 효용성을 한눈에 알아봤던 일본을 비교할 때마다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0. 비흡연으로 명예회복한 병자호란 충신 김상용
조선시대의 재떨이와 담뱃대(장죽·사진 위). 담배와 흡연 문화가 확산되면서 재떨이와 담뱃대(장죽)도 조선 중기 이후 사랑방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재떨이는 본래 목제가 주종을 이뤘는데 때로는 가죽, 도자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담뱃대는 길이가 긴 것은 장죽, 짧은 것은 곰방대라고 불렀다. 사진에 보이는 세 개의 침은 헤비(아래)로서 담뱃대의 막힌 구멍을 뚫는 데 사용됐다.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 11월, 조정에서는 문제가 불거졌다. 강화도가 함락될 당시 순절(殉節)했던 김상용(金尙容)의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자 김상용은 남문에 올라가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했다.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돌았다. “김상용은 절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담뱃불을 붙이려다 실수로 화약에 불이 옮겨 붙어 폭사했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문을 반신반의하여 김상용의 순절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김상용의 아들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부친이 평소 흡연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순절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 억울함을 항변했다. 그들은 특히 김상용이 사위 장유(張維)가 흡연하는 것을 면전에서 질책할 만큼 흡연을 혐오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다른 신료들도 이들의 호소에 동조하면서 인조는 비로소 의심을 풀었다. 흡연 여부가 김상용의 명예를 좌우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장유가 애연가이자 담배 예찬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담배의 효능을 칭송하는 글’에서 “배고플 땐 배부르게 하고 배부를 땐 배고프게 하며, 추울 땐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땐 서늘하게 한다”며 담배를 찬양했다.
또 담배가 약재로서도 탁월하다며 장차 차와 더불어 기호품의 수위를 다투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자신의 흡연을 나무랐던 장인 김상용의 질책은 질책이고 애연 기호 자체를 숨길 수는 없었던 셈이다.
남초(南草)라 불렸던 담배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직후였다. 이후 흡연 풍습은 급속히 퍼져 인조대에는 남녀노소를 떠나 전 계층이 담배를 피운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흡연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정신과 기를 상하게 하는 건강상의 폐해뿐 아니라 화재를 부르고 시간과 재물을 허비하게 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안정복(安鼎福)은 특히 흡연과 관련된 풍기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흡연하려 할 때 길 가는 사람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부녀자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스스럼이 없는 것, 노비에게 달라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초를 가리켜 ‘요망한 풀’이라고 했다.
담뱃값을 대폭 올려 흡연을 억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값을 올린다고 청소년 등의 흡연이 줄어들까. 올라버린 담뱃값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요망초’로 매도하거나 값을 올린다고 해서 습관으로 굳어진 기호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출처] :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중앙일보
[출처]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1회 ~ 10회|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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