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형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가해진 형벌이었다. 즉 일부일처제라는 혼인질서를 지키기 위해 부정한 짓을 저지른 남녀의 생식기를 자르고 틀어막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잔인한 혹형酷刑으로 변했고, 그 대상도 주로 남성에 한정되었다.
당초 궁형은 사형을 대체하는 형벌이었으나 그 뒤 사형이 아닌 다른 죄들에 적용되었다. 무제 때 오면 사마천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궁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천과 장군 이연년, 장안세의 형님 장하 등이었다. 궁형은 다른 말로 부형腐刑이라고 한다. 생식기를 자르고 나면 며칠 이내 상처에서 살이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다음은 궁형의 방법이다. 오래 전부터 궁형을 시행해온 아랍 지역의 궁형은 간단했다. 이 형벌은 강간죄를 범한 자에게 시행되었는데, 성기를 나무로 만든 도마 위에 얹어놓고 도끼로 잘라버린다. 하지만 중국의 궁형은 이와는 사뭇 달랐다. 먼저 성기(고환까지 포함해서)를 끈으로 꽁꽁 묶어 피가 통하지 않게 하여 자연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날카로운 칼로 성기 전체를 잘라낸다. 그리고는 향회香灰라는 지혈제를 뿌려 지혈한 다음 거위의 깃털을 요도에 밖는다. 며칠이 지난 뒤 거위의 깃털을 뽑는데, 오줌이 나오면 궁형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고 오줌이 나오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궁형을 당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어둡고 따뜻한 잠실蠶室이란 곳에 보내져 요양하게 되는데 이는 궁형을 당한 사람이 찬바람을 쐬게 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천이 "거세되어 잠실에 던져졌다"고 한 것이다. 궁형에 실패한 사람은 폐인이 되며 대개는 요독증으로 죽고 만다.
그런데 궁형은 나이가 많을수록 위험하다. 궁형을 당했을 당시 사마천의 나이가 49세였으니 위험부담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니 궁형을 자청한 그의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사형을 판결받은 사형수가 다시 목숨을 걸고 궁형을 자청하는 그 어처구니없고 기막힌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라.
사마천의 궁형은 중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의리를 강조하는 그 많고 많은 유가의 인물들은 다 어디에 숨어서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던가? 갖은 부귀영화를 다 누리던 그 많은 권세가들에게 50만 전이 없어, 죽음보다 더한 궁형을 당하는 사마천을 모른 척했단 말인가? 독재의 그늘에서 숨죽인 채 자신 한 몸 보신을 위해 전전긍긍하던 당시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행태, 그것이 바로 위풍당당했던 무제 시대의 실상이자 비극이었다. 사마천은 시대의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희생양으로만 머물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대해진 것이다.
-김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