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랑살이에도 한계가 있었다. 행랑이 딸린 큰 가옥이 무한정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행랑에도 수용되지 못하는 영세민은 거리로 나가야 했고 이른바 토막민이 되어야 했다. 또 하층계급민도 서울에 와서 몇해를 살게 되자 점차 자아를 각성하게 되었고 주인집에 종속되기 보다는 토막살이일지라도 독립하는 편이 좋다는 인식도 일반화되어 갔을 것이다.

1940년 봄에 당시 경성제국대학 철학부 학생 일부가 경성부내 일원의 토막민의 실정을 조사하여『토막민의 생활과 위생』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토막민이라는 것은,

「요컨대 토막민은 조선인 빈궁계급이 도시의 일우(一隅)에 군거(群居)하여 비참한 빈민굴을 형성하게 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시영세민에 불과한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토막민이라는 특수한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가. 이처럼 굴욕적인 명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토막민을 조선의 다른 도시영세민과 구별하는 유일한 상이점은 그들 토막민이 토지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내나 교외를 불문하고 제방 · 강바닥(河原) · 다리밑 · 산림 등의 유한지(遊閑地)를, 관유지 · 사유지를 가릴 것 없이 무단으로 점거하여 특유의 극히 초라한 움막을 지어 살고 있으며 날마다 달마다 그 수가 늘어가서 마침내는 비참과 혼잡과 불결을 특색으로 하는 이른바 토막부락에까지 발전하는 것이 상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의 불법점거는 오로지 그들의 절박한 빈곤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당국으로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토막가옥의 그칠 줄 모르는 범람이 도시미관상 및 도시위생상 커다란 문제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시영세민을 토막민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게 되고 이 명칭이 점차 일반에게도 사용되어지고 있다.[註8] 」

라는 것이다.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 · 사유지를 무단점거하여 거주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토막의 어원은,「막(幕)」은 조선어의「막」에 해당하는 자(字)이며 주막 · 원두막 · 오막살이 등의 막(幕)과 어원이 같으며 「토(土)」는 토벽 또는 황벽(荒壁)이라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요컨대 「토막(土幕)」은 허술한 움막을 가르키는 말이고 「토막민(土幕民)」은 그속에 거주하는 자라는 뜻이다.

토막이 언제부터 생겨났는가에 관해서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아마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에도 유개걸식자(流**乞食者)들은 이러한 움막을 건설하여 우로(雨露)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막이 일정지역에 집단화하여 이른바 토막부락을 형성하게 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의 일인 것 같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로 동경제대 위생조사부의『토막민의 생활과 위생』은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토막의 발생은 조선에 근대자본주의가 유입된 한일병합 이후의 일에 속하며 또 그것이 하나의 사회문제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더욱 훗날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정 8년(1919, 기미)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사전에서 아직 토막이라는 낱말이 수록되지 않았음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잡지『조선(朝鮮)』1932년 10월호에 실린 선생영조(善生永助)의 「특수부락과 토막부락」이라는 글에 의하면 1930년 현재 서울근교의 토막부락 조사결과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성부 고시정(현 후암동) 19번지 58가구 265

경성부 도화동 산 1,2번지 77가구 333인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현 신당동) 112가구 303인

경성부 도화동 산 8,9번지 110가구 1,142인[註11]

고양군 연희면 북아현리(현 북아현동) 59호 247인」


즉 위와 같은 조사결과, 1930년경에는 많은 숫자가 아니며 그 지역도 많은 지역이 아닌 점으로 미루어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주로 1930년대 이후에 크게 늘어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토막민의 생활과 위생』에 의하면 당시 경성부 내에서의 토막민 증가의 상태, 그 분포 등은 <표:경성부내(京城府內) 토막민(土幕民) 증가상태>와 같다.

경성부 내외의 토막민호구수 변동상황은 위표와 같은데, 대체로 누년증가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1939년에 두드러지고 있다. 이것은 그 해에 일어난 전국적인 대한발(大旱魃)에 의하여 이촌향도하는 빈농이 많았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935년에서 1937년에 걸쳐 약간 감소한 것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경성부가 교외지역인 홍제정 · 돈암정 · 가현정 등에 토막수용지를 설정하여 부내(府內)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한 때문이었으며 이들 수용지의 토막민은 부가 지정한 토지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불법거주는 없어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생활상태는 일부의 열외(列外)를 제외하고는 다른 일반의 토막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이들까지 가산한다면 그 수는 지난 10년 내로 증가일로에 있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1939년 현재의 토막의 수는 4,292호 20,911인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현지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가 제시한 숫자는 대체로 실수(實數)보다도 적은 것같이 생각된다. 토막은 피동적인 또는 자발적인 요인에 의하여 이동이 심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토막가옥은 종횡으로 무질서하게 서로 연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일한 토막가옥내에서도 셋방이나 셋집(대가)의 관계가 지극히 복잡하여 각호별로 정확한 호구를 조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하는 일이니 경성부의 조사가 정확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경성부 사회과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수용토막민은 홍제정 4,710인, 후암정 4,266인, 아현정 3,708인(이상 1940년말 현재) 합계 16,344인에 달한다.(그러므로 수용 · 비수용토막민의 통계는 36,000명이 넘는 셈이다.)

이들 약 36,000명의 토막민경성부내의 구석구석, 산림 · 강바닥 · 다리밑 등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인데…(중략)…대체로 토막의 대부락(大部落)은 교외에 많으며, 시내에서는 당국의 단속이 엄중하기 때문에 부락을 이룰 만큼 발전하는 일은 적으며 다리밑 · 강바닥 · 성벽의 그늘 · 언덕밑 같은 곳에 몇 집씩 모여 살고 있다.

아현정 · 신당정은 시내에 있어서의 토막대부락의 대표적인 것이며 홍제정 · 돈암정 · 아현정은 이른바 부영의 토막수용지이다.」

이상이 토막민에 대한 대체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동서(同書)가 토막민 집단부락 소재지로서 도시한 지역은 상기한 아현동 · 신당동 · 홍제동 · 돈암동 이외에 동대문 밖 용두동 · 신설동 · 제기동 · 충신동 · 창신동 · 금호동 · 왕십리 · 청량리일대와 미아리의 길음교 밑, 용산구의 동부이촌동 · 서부이촌동 일대, 마포구의 공덕동 · 도화동 · 마포 산일대 그리고 노량진 · 영등포동 일대 등, 당시의 교외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상과 같은 조사를 통하여 서울의 무허가건물은 대체로 1925년경부터 시작하여 1930∼1940년대에 걸쳐서 대량 건립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동서(同書)가 기술한 토막민에 관한 조사결과를 요약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당시 서울토막민의 약 3분의 2는 빈농으로서 이촌향도한 사람들이며 나머지는 원주민 중의 빈곤생활자들이다.

② 그들 토막민을 인구론적으로 관찰하면 20∼30대의 청장년층의 수는 적고 혼인은 제약되어 출생률은 낮으며 자녀 사망률이 매우 높아 극빈자 특유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③ 토막민과 다를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는 조선의 농촌 · 도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앞으로 토막민은 이들을 원천으로 하여 계속 강하게 늘어갈 것이며 특히 농촌으로부터의 유입이 성해질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④ 토막민들의 직업은 날품팔이(일용노무자) · 인부 · 직공 · 행상 등 육체노동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특수기능보유자는 대단히 적다. 근년(近年)의 물가와 노임(勞賃)의 앙등(仰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루 평균수입은 남자 1원 20전, 여자 56전에 불과하다. 여자의 취업률은 대단히 낮다.

⑤ 총지출중에서 음식비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총수입액의 71%에 달한다.

⑥ 부채(負債)는 1호당 평균 34원8전이며 빈곤의 도가 지나쳐서 빚(차금(借金))을 낼 수 없는 자도 적지 않다.

⑦ 주거생활의 비참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고 집이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임시가설물 같은 것이 많다. 한 가구가 한방만 쓰는 집이 총호수의 80% 이상에 달하고 1인당 평균거주평수는 0.45평(1.485㎡)에 불과하다.

⑧ 1인당 의류수는 하동복(夏冬服)을 합쳐 3.5벌밖에 안되며 한벌 옷으로 지내는 자가 과반수이다. 1호당 평균 침구수는 이불 1.6매, 요 1.4매에 불과하다.

⑨ 토막민 성인남자가 하루에 섭취하는 총열량은 약 2,770칼로리이다. 부식물은 일반적으로 단백질이나 지방질이 적고 된장과 같은 가장 값싼 단백원마저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⑩ 토막민의 80% 이상이 한글도 읽지 못한다.

⑪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토막민은 아무런 적극적 희망을 가지지 않고 극빈생활에 깊이 빠져 오로지 그날 그날의 생활에만 급급하고 있다.

⑫ 토막민의 생활상태는 의식주 기타 모든 측면에서 고찰하여 가장 비참하며 일본영토내의 제영세민중 최하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⑬ 이들 토막민에 대하여 관할관청(경성부청 기타)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고 그 장래는 참으로 우려할 상태에 있다.」


이상이 당시 경성에 살던 36,000여 토막민들의 생활상황에 관한 요약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토막민들의 의식주 생활전반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비단 토막민으로 규정된 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토막민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자는 조선의 도시 · 농촌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표현에서 당시 경성에는 이같은 인간이하의 주생활자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일제하 서울 주택사정의 대체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은 조사를 실시하고 출판되기까지 일본인 교수의 지도하에 반수(半數) 이상이 일본인학생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조사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절감하게 한다.


 내용출처: 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10-1-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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