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당시 34세의 김일성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만주를 누비는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 장군'은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김일성은 너무나 젊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김일성 가짜설이 시작된다. 북쪽의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려 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주장을 처음 제기한 책은 1945년의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 1950년의 <김일성 위조사> 등이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의 저자는 누구인가?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김동운은 만주의 봉천 일본 영사관 소속의 고등계 형사였다. 또 다른 저자인 김종범은 친일파 지주들의 근거지였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의 간부였다. <김일성 위조사>를 펴낸 이북도 일제 강점기에 도쿄에서 아세아민족연구소라는 친일 단체를 운영했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타도동지회 회장으로 변신한 친일파다.


처음 김일성 가짜설을 유포한 이들은 이처럼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이었다. 이들이 분단 상황에서 북쪽의 김일성을 깎아내리고자 유포한 거짓말이 수십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 "김일성은 가짜다"라고 당당히 댓글을 다는 이들은 그것이 해방 후 궁지에 몰렸던 친일파의 거짓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26세에 항일 유격대 지휘관을?


김일성이 민족적 항일 영웅으로 부각한 사건은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사건'이다.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에 만주의 조선인 유격대가 함경남도 국경 지대의 면사무소 소재지(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습격한 이 사건은 김일성을 '스타 독립운동가'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했다.


여기서 잠깐 김일성의 나이를 둘러싼 의혹부터 살펴보자. "어떻게 26세의 나이에 유격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겠어?" 하고 묻는 독자라면, 일제 강점기 당시 상황을 살펴야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26세는 전혀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이재유 등 당대의 가장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었던 김좌진 장군도 당시 나이 31세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장교를 상대로 폭탄을 투척할 때의 나이는 고작 24세였다. 해방 이전 국내에 거점을 둔 마지막 독립운동 조직을 이끌었던 이재유는 어떤가? 그의 첫 옥살이는 25세 때였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김일성이 26세에 항일 유격대의 지휘관이었던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군의 혹독한 탄압에 맞서서 평소에는 이 산 저 산, 이 마을 저 마을 숨어 다니며,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 유격 작전에 백마 탄 노장군이 가당키나 한가?



▲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프레시안


보천보 전투는 없었다?


독자의 댓글 중 일부는 김일성을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사건에 토를 단다. 맞다. 실제로 이북이 자랑하는 이 "위대한" 전투의 실상은 보잘 것 없었다. 6월 4일 당일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군이나 경찰은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군이 200만 명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보천보 사건은 '전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은 항일 영웅으로 떠올랐을까? 이 사건이 일어난 1937년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이 위축되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만주의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서 일본군을 타격한 것이다. 승리에 목말라하던 당시의 조선 민중에게는 청량제 같은 소식이었다.


더구나 국경에서 일어난 이 보천보 사건이 전국으로 퍼지게 된 데는 <동아일보>의 공이 컸다. 당시 <동아일보>는 두 차례나 호외를 발행하면서 이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공비들의 살인, 방화, 약탈"을 보도한 이 신문의 호외를 받아본 조선 민중은 흥분했다. '아, 독립군이 드디어 일본군을 박살냈구나!'


김구의 외침,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가 두 차례의 호외를 발행한다. 이어 조선일보, 경성일보 등을

비롯한

주요 신문들이 앞 다투어 소식을 전한다.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접하는 그 순간 창문을 열어 제끼며 수차례 큰소리로 외쳤다.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술도 끊고 울적한 심사를 달래던 

여운형은 주위 사람들을 불러 밤새 술을 먹고는 

다음날 보천보 현장으로 달려가서 확인 하엿슴


달려가 직접 눈으로 일제의 패배를 확인했다.

패배주의에 빠진 대중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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