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釜山美文化院放火事件)은 1982년 3월 18일 최인순, 김은숙, 문부식, 김현장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띄는 방화 사건이다. 불은 약 2시간 만에 꺼졌지만, 미국문화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학교 재학생 장덕술(당시 22세)이 사망했고, 역시 동아대학교 학생 김미숙, 허길숙 외 3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북한의 사주를 받은 학생 내지는 반사회성을 지닌 성격이상자들의 난동으로 홍보하고 대대적으로 구속했으며, 구속 과정에서 천주교 신부 최기식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관련자들까지 체포하면서 전두환 정권과 종교계 간의 싸움으로도 비화되었다. 1983년 3월 8일 관련자 문부식, 김현장은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다가, 일주일 만인 1983년 8월 1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들의 처벌수위가 낮아지면서 사건이 성공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반미주의 시위와 미국문화원, 미국대사관에 대한 방화, 투석, 기물파손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전에도 반미주의 운동은 존재했으나 이 사건 이후로 200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반미주의 운동을 가속화시켰다. 일명 부미방, 1차 부미방, 부미방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당시 삐라에 찍혀 있던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전두환의 북폭작전',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최후발악으로 전두환 정권은 무기를 사들여 북침준비를 이미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꿈꾸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가 북한 폭격을 계획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가 반북한 여론을 조장한다'는 등의 주장 중 일부는 허위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들이 날린 삐라는 울산과 일본 쓰시마 섬, 규슈까지 날아가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오보로 알려지면서 기사가 삭제되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당시 사건의 담당검사 중 한명은 최병국, 사건 당시 피의자들 중 허진수, 김화석을 변호한 변호사는 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이었고, 사건을 재판한 담당 판사 중의 한명은 이회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