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로 외국어를 독학했던 가난한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대학을 중퇴하고 고졸 학력으로 신문사에 수석합격을 하게 되며 1970년대에서 1980년 대를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모범적 기자가 되었다.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환경 문제를 다룬 1974년 중금속 오염실태 조사 특종으로 한국기자상(7회) 수상, 1974년 기자협회 국제신보 분회의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유신정권의 장기화와 언론의 반정부 투쟁(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등)에 동참해 반정부, 반박정희 노선에 참여, 언론자유 투쟁.
그는 박정희 정권을 가장 많이 비판한 기자로 손꼽히는데, 그는 현장을 발로 뛰며 항상 팩트에 중점을 두었고 그로인해 1976년 포항 유전 경제성 없다는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국도 곧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던 때였는데 이것을 젊은 기자로 인해 허상임이 밝혀지게 되었으니 박정희의 측근들은 문책이 두려워 보고를 하지 않고 압력 행사해 석유관련 보도 금지를 해 놓게 된다. 이에 젊은 기자는 포항유전의 비경제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석유관련 정부부처, 각 언론사 주한 외국 특파원 앞으로 발송을 하며 이후 이 젊은 기자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기자직에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는 이외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특종을 상당 수 작성하였다. 부마항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추적 보도, 부마항쟁과 김재규 그리고 10·26사태 간의 관계 탐사보도, 이후락 전 정보부장의 인터뷰. 박정희와 동거한 여인에 대한 기사.
시간이 흘러 중정부장이 바뀌며 복직이 된다. 그리고 정권도 바뀌어 새로운 신군부의 독재가 시작된 1980년 5.18 광주 그는 병가를 내고 광주에 잠입해 취재를 하는데 당시 광주를 취재한 유일한 대한민국의 기자였다. 그는 이 문제로 다시 해고를 당하게 되며 같은 해 8월 신군부는 전국 언론사에 그를 고용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진보적 성향의 월간 마당 창업 멤버가 된다. 월간 마당은 가로쓰기 크고 명확한 사진 한글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시도를 하였다. 1982년 김근하 어린이 유괴사건의 검찰 측 고문 조작 사건을 기사를 작성하여 이슈가 되었는데 "공명심에 가득 찬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고문을 해 사건을 조작했으며, 무전과의 무고한 청년의 인생을 망쳤는지에 대한 상세한 고찰로 기사를 작성하였다" 그가 작성한 기사를 시나리오로 '신화 1900'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공연되었고 이 연극은 그 해 많은 상을 받았으며 MBC 수사반장에서도 이 기사를 토대로 드라마가 나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특종을 찾아내는 감은 탁월하여 국내 활동하는 CIA 조직에 대해 심층 취재로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발생된 이수근 간첩사건에 대하여 1989년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제하의 기사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위장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던 사건이다.
그는 현재 조갑제닷컴 CEO 조갑제 대표이다.
조갑제 대표는 4공, 5공 비리를 파헤치던 기자였으며 목숨을 걸고 진실을 탐구하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박정희의 부정을 알리고 전두환 정권에서는 전두환의 부정을 국민에게 알렸다. 그의 탐문취재나 심층취재 방법은 지금까지도 언론인으로서의 귀감을 받고있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며 진보적이었던 그의 성향이 어떤 이유로 보수 반공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점은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가 실패하고 노태우가 정권을 잡은뒤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의 삼당합당이후인 1989년부터 글의 논조가 바뀌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갑제 대표는 진보 언론인과 문객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보수 반공 언론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었다.
그는 이번 박근혜 후보의 유신 사과 발언에 대하여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은 불효·불충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박근혜 씨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이 짧은 기간에 180도로 바뀔 수가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이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양심을 버렸다는 증거"라고 거듭 박 후보를 비난했다. 그는 또한 "5·16혁명과 유신 선포는 당시의 헌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였음이 분명하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며 "헌법적 정당성과 역사적 정당성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후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갑제 대표의 글을 읽을때마다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그가 박근혜 후보에게 했던 말처럼 "어떻게 사람의 생각이 이 짧은 기간에 180도로 바뀔 수가 있는가" 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그의 말중 하나는 5.18 은 반공 반독재 운동으로 당시 광주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구호는 "김일성은 물러나라" 였으며 어떠한 북한군이나 간첩을 광주에서 본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2007 년 대선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언론인으로 노무현 정부의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조갑제를 거론하였다. 그는 "2007년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재야에 머물며 100년 대계의 꿈을 삭이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부사"라며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떠나 그들을 경외롭게 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아마도 이번 대선(2012년)에서도 보수 반공의 아이콘 조갑제 대표의 발언 하나 하나가 굉장한 파급 효과를 가져올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조갑제 대표의 과거 기자로서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논평은 글쎄 올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owind&logNo=50151493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