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의 거짓말
첫눈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국민학교 시절 창 밖으로 첫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수업 시간인데도 웅성거린다. 엄격하기만 하던 호랑이 선생님도 이 때만은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첫눈이 내리면 코트의 깃을 세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첫눈을 맞으면서 서성거리면 무슨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에 젖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서설瑞雪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많다. 노랫말에도 대개는 사랑과 소망을 담고 있다. 하기야 강아지도 눈이 내리면 컹컹 짖는다는데...... 사람의 심정이 오죽하랴.
첫눈에 감회를 적시는 심정은 옛날에도 지금에 못지 않았다. 아니 더한 낭만에 젖었던 모양이다.
조선조 시대의 왕실에서는 첫눈이 오는 날에 한하여 임금을 속일 수가 있었다. 이른바 서양풍속인 만우절과 같은 것이었다. 서양의 풍속은 4월 1일을 만우절로 정해놓고 있는 까닭으로 이미 며칠 전부터 거짓말을 할 궁리를 한다. 날짜가 정해져 있기에 거짓말도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니 멋도 낭만도 없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눈이 오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게다가 거짓말도 단순한 것이 아니라 운치있고 재미난 게임과 같이 했다. 첫눈이 내리면 그 눈을 종이에 싸거나 그릇에 담아서 상대에게 선물로 보낸다. 가령 세자가 어머니인 중전에게 보내기도 하고, 임금이 딸인 공주에게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때의 구실은 무엇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마마마, 겨울인데도 진귀한 과일이 들어왔기에 몇 개 올립니다. 거두어 주시오소서."
"공주, 중국에서 비단이 왔구나. 옷을 지어 입도록 하라."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보내는 그릇은 아무리 커도 상관이 없으나 들어 있는 것은 반드시 첫눈이어야 한다. 승패는 눈선물을 받은 사람이 지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기에 임금이 내린 하사품도 이 날만은 퇴짜를 놓을 수가 있다. 문자 그대로 구중궁궐이라 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방안에만 앉아 있었기에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음을 모르는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가 판명되면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소망을 말하고, 진 사람은 그 소망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 소망이라는 것도 대개는 대신들이나 상궁, 내시들에게 술상을 내리게 한다든가, 옷감을 내리게 하는 것 등이다.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서 임금에게 거짓말을 한다든가, 임금을 속였다면 대죄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첫눈이 내리는 날에, 그것도 눈으로만 임금을 속일 수가 있었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지혜로운 풍속이던가.
왕실의 법도만큼 엄격한 것도 없다. 그 법도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제약한다. 그와 같은 법도의 틀에 사람의 감정을 묶어 놓으면 개성이 규격화되기 마련이다. 또 삶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규격과 틀을 깨는 것은 사는 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게 된다. 첫눈이 오는 날을 만우절로 정한 것은 대단한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지헤롭게 산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자유분방하게 사는 서양 사람들이 만우절을 정하여 하루를 즐기는 일과 조선왕조와 같이 엄격한 규범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첫눈이 오는 날을 골라 파격의 멋과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역사가 사람의 일을 적는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동서양이 있겠는가.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그 해방감을 즐기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어도 생각은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운치와 덕담을 즐기는 일에는 우리의 선현들도 남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리라.
-신봉승, '첫눈 오는 날의 거짓말', "양식과 오만"중에서 (1993년 갑인출판사)
세종실록에서 '첫눈'으로 검색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