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국민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크레파스는 '피카소파스'였다. 이 크레파스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피닉스파스'로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옹색하게 새 상품명이 적힌 종이를 크레파스 갑 위에 덧댄 채 말이다. 피카소가 공산당원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종석
피카소와 '코끼리'
시각장애인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장님 코끼리 보듯 한다'는 속담을 떠올려 본다. 선입견에 빠져 거짓을 진실로, 일부를 전체로 착각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랬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르트르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자 뤼마니테(공산당 기관지)는 "한국에서 미국의 꼭두각시들에 의한 중대한 전쟁 도발, 인민공화국의 군대가 남한군의 침략에 의기양양하게 대응하다"며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북침설'을 게재했다. 후에 거짓으로 드러난 이 주장을 사르트르는 적극 지지했다. 옛소련이 일삼던 국가폭력을 '진보적 폭력'이라며 두둔하던 메를로퐁티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소련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확인하고 자기 주장을 철회한 것과 달리, 사르트르는 남침설이 우세해진 뒤에도 "북한군이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의 함정에 빠져 실수를 저질렀다"고 둘러댔다('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민음사).
사르트르의 착각은 공산주의를 희망이자 미래로 여긴 20세기 중반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화가 피카소는 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프랑스에서, 소비에트 연방에서, 그리고 나의 조국 스페인에서 가장 용감했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내가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소련은 공산당원 피카소를 선전.선동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51년 1월 18일,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대작 한 점을 완성한다.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시 피카소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친소련.반미국적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중세풍의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그림 자체에는 딱히 반미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제목은 '한국에서의 학살'이지만, 시대를 초월해 모든 전쟁과 폭력에 항거하는 보편성을 담은 것이다. 이 점에서 과연 피카소는 천재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 따라 이 그림을 '장님 코끼리 보듯' 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당연히 반미적 작품으로 규정해 전시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프랑스 공산당도 그림을 반기지 않았다. '살인자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다.
피카소 본인도 "나는 미국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한국은 어땠을까. 피카소나 '한국에서의 학살'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서울지검 공안부 김종건 검사는 피카소 크레파스.피카소 수채화 물감 등의 이름으로 상품을 만들어온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씨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회사 제품의 광고를 중지시켰다'.-69년 6월 9일자 중앙일보 기사다.
희한한 것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에서의 학살'의 국내 전시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일부 언론이 '미군에 의해 자행된 북한 신천 대학살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토를 달았다는 점이다. 여러 전문가에게 문의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에도 묘사되었듯 신천 학살은 좌우익 간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일 가능성이 더 크다.
지난달 저서 '피카소'를 낸 작가 김원일씨도 "북측의 안내로 신천박물관을 둘러보았지만 당시 참상 사진 중 미군이 학살하는 장면은 한 장도 볼 수 없었다"고 책에 썼다. 피카소가 이 사건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는 증거도 없다.
피카소라는 '코끼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촌극들을 지하의 피카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쨌든 '한국에서의 학살' 국내 전시가 성사되면 꼭 가서 보아야겠다.
[중앙일보] 입력 2004.05.04 18:37 / 수정 2004.05.05 09:12
-노재현 문화부장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전쟁 중 1951년 황해도 신천에서 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이르는 3만5천여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은 이 사건을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천 학살사건은 1951년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한국에서의 학살"은 물론 피카소도 한국에서는 금기가 되었다. 1969년 6월 서울지검 공안부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 '피카소 수채화 물감' 등을 생산하고 있던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그 제품의 판매 및 광고를 금지시켰다.
-이재봉, '피카소가 고발한 신천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