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군복 입히고 미그기에 북한기 마크 달아 극비 투입"


"유엔군 전투기 17대 격추..포로 못되게 해 권총 자살한 조종사도"


"민간인 희생 너무 커..김일성 전쟁 시작 말았어야"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김일성은 6·25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전쟁으로 엄청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1950년 말부터 소련 공군 조종사로 6·25 전쟁에 참전해 약 1년 동안 중국ㆍ북한 국경 지역과 북한 내륙 지역에서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투기들과 맞서 싸운 퇴역 장성 세르게이 크라마렌코(88)는 23일 한국 전쟁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941년 4월 공군에 입대해 1981년 5월 소장으로 퇴역하기까지 40년을 전투기와 함께 산 베테랑 조종사에게도 전쟁의 상처는 여전히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음이 분명했다.

   크라마렌코는 이날 오후(현지시간) 모스크바 남쪽 '프로프소유즈나야' 거리의 자택에서 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51년 4월부터 52년 2월까지 11개월 동안 소련 제64 전투항공군단 제324 전투항공사단 산하 제176 근위연대 소속 장교(대위)로 6·25 전쟁에 참전해 미군 전투기를 포함해 유엔기 17대를 격추했다"고 술회했다.

   옛 소련은 물론 개방 이후의 러시아 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옛 소련군의 6·25 전쟁 참전 사실을 한국 언론에 상세히 공개했다.

   크라마렌코는 전투 공적을 인정받아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련 영웅' 훈장을 받았으며, 김일성 전(前) 주석의 초청으로 북한을 3차례나 방문하기도 했다.

   소련은 1950년 10월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과 북한의 요청으로 같은 해 11월부터 극비리에 자국 공군을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파견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의 전투에 투입했으나 이 같은 사실이 미국에 알려져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파병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크라마렌코는 인터뷰에서 "소련 공군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종사들에겐 중국 인민해방군 군복을 입혔고, 소련제 미그(MiG) 전투기에는 북한 공군기 마크를 붙이도록 했다"며 "참전 초기에는 조종사들이 상호 교신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고 사전 교육한 기본 한국어로 소통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중ㆍ북 국경 지역에 공군 병력을 유지하며 전투에 개입한 소련은 종전 이후에도 줄곧 파병 사실을 숨겼다.

   그러다 개방 후인 90년대 들어 러시아 현지 언론 보도와 비밀 자료 공개 등을 통해 참전 사실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소련 조종사가 직접 한국 언론에 전투 상황을 상세히 밝힌 것은 처음이다.



   다음은 크라마렌코 퇴역 소장과의 일문일답.



   -- 언제부터 6·25 전쟁에 참전했나.

   ▲ 1950년 11월 제176 근위연대 소속의 다른 조종사 31명과 함께 자원해 중국 북동부 지역으로 가 이듬해 4월부터 전투에 참가했다.

   중국ㆍ북한 국경 지역에 도착한 후 약 4개월 정도 전투 훈련을 받고 나서 단둥(丹東)에 주둔 중이던 제64전투항공군단 제324 전투항공사단 산하로 들어가 52년 2월 러시아로 돌아올 때까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의 각종 공중전에 참여했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서였다.


   -- 어느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나.

   ▲ 미군들이 '알레야 미고프(미그기 계곡: MiG Alley)'로 부르던 압록강 주변의 중ㆍ북 국경 지역과 북한 서부 내륙 지역이었다.

   상부에서 평양-원산 이남 지역이나 해상으로의 출격은 금했다. 적기에 격추돼 잔해가 미군 손에 들어갈 경우 소련 공군의 참여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미군의 F-84, F-86 전투기와 B-29 전략폭격기 등을 상대로 싸웠다.


   -- 어떤 전공을 세웠나.

   ▲ 미그-15기를 몰고 149회 출격해 F-84와 F-86 등 17대의 미군과 호주군 전투기를 격추했다. 그중 13대는 지상에 떨어져 확인이 됐지만 4대는 서해에 추락해 확인이 안 됐다. 공식적으로는 13대를 격추한 셈이다.

   나보다 많은 22대까지 격추한 조종사도 있었지만 나도 최고 수준의 조종사를 뜻하는 '아스(에이스 Ace)' 칭호를 얻었다. 전투에 참여 중이던 51년 10월엔 소련 시절 최고의 영예인 '소련 영웅' 훈장도 받았다.


   -- 소련 공군 전체의 전공에 대해 들은 바는.

   ▲ 소련 전투기가 약 1천200대의 유엔군 전투기를 격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중엔 핵탄두를 실어나를 수 있는 전략폭격기인 B-29 약 50대도 포함됐다. 물론 한국전에 참여한 B-29기는 핵탄두가 아닌 일반 폭탄 투하에 이용됐다.

   이에 비해 소련 측에서는 335대의 전투기만이 격추당했다. 전투 초기엔 구형 미그-15기로 싸웠지만 이후 신형 미그-15기가 투입됐다. 신형 미그-15기는 미군 F-86 전투기보다 기관포 사거리나 속도 면에서 성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우리가 더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 제64전투비행군단에 투입된 비행대 규모는.

   ▲ 50년 11월 참전 때부터 53년 7월 철군 때까지 모두 10여 개 비행사단이 참전한 것으로 안다. 조종사들은 약 3개월에서 10개월 단위로 계속 교체됐다. 그렇지만 약 1천 명 정도의 조종사들이 꾸준히 군단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비행사단을 지원하는 곡사포 부대나 보급부대 병력, 기술요원 등을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일부 자료는 모두 약 7만명의 소련 공군 병력이 6·25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은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극비에 부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조종사들에겐 중국 인민해방군 군복을 입혔고, 우리가 몬 미그(MiG) 전투기에는 북한 공군기 표식을 붙이도록 했다.

   참전 초기에는 조종사들이 상호 교신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고, 사전 교육한 기본 한국어로 소통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후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 한국어 교신이 무리임을 깨달은 지도부가 나중에 이 같은 규정을 철회했다.

   또한 적군에 포로로 잡히는 것도 금지해 일부 조종사들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해 권총으로 자살하기도 했다.


   -- 직접 격추당한 적도 있나.

   ▲ 러시아 귀환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52년 1월 중국 국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북한 내륙 지역에 추락해 포로가 될 뻔한 적이 있다.

   미군의 기관포 사격을 받고 전투기가 화염에 휩싸여 낙하산으로 탈출했는데 미군 조종사가 끝까지 따라오며 기관포를 쏘아댔다.

   다행히 포탄을 피해 다치지 않고 어느 들판에 떨어져 헤매고 있는데 옥수수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북한 주민 부부가 나를 발견했다.

   이들은 처음에 나를 미군으로 오인하고 적의를 보이다가 내가 짧은 한국말로 "김일성", "스탈린" 등의 단어를 내뱉으며 "북한을 도와주러 온 소련 조종사"라고 하자 그제야 경계를 풀고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 김치와 술을 대접했다. 이후 북한 당국의 연락을 받은 소련군이 나를 찾아와 데리고 갔다.


   -- 북한은 참전 소련 조종사들을 어떻게 대했나.

   ▲ 소련군이 북한과 중국 공군 조종사들을 교육해 나중에 함께 힘을 합쳐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이 나를 포함한 공군 조종사들을 3차례나 초청했다. 마지막으로 초청을 받은 것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전해인 1993년이었다.

   이때 김 주석은 나를 보고 피곤해 보인다며 금강산에 가 쉬도록 주선해 줬다. 이후 정권을 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를 초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러 북한 대사관은 지금도 1년에 2~3차례 나를 연회에 초청한다. 참전 조종사 가운데 나를 포함해 3명이 살아있지만 다른 조종사들은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아 내가 대표로 참석한다.


   -- 60년이 지난 6·25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김일성은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시작한 전쟁은 미군을 끌어들이는 동기가 됐고 전쟁이 확산하면서 엄청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힘없는 수많은 어린이와 노인들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지금도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을 계획하던 미국의 공세를 저지했다는 자부심은 잃지 않고 있다.


   cjyou@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6/24 14:2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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