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50년>(15)소련의 개입

[경향신문]|2000-08-23|13면 |45판 |특집 |인터뷰 |4901자


1951년 4월11일. 공산군의 제4차 대공세가 한창일 때였다. 미군의 B29 폭격기 편대 48대가 200대의 엄호용 전투기와 함께 북한 폭격에 나섰다. 공습경보가 소련 제64항공군단(공식 명칭은 제64독립추격항공군단)이 머물러 있던 중국 단둥(丹東)의 공군기지에 울려퍼졌다. 당시 소련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전원 2차 세계대전때 베를린 공습 등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조국전쟁 영웅인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소련 공군 미그15 편대는 B29 편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 800m쯤 미군 전투기 편대가 접근하자 37㎜와 23㎜ 기관포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 전투기 사정거리가 미그기보다 짧은 400m인 점을 이용한 것이다. 1차 공격으로 8대의 B29를, 2차 공격때 4대의 B29를 추가로 격추시켰다. 하늘이 온통 낙하산으로 가득찼다. B29 폭격기마다 10∼12명씩의 조종사와 승무원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B29 폭격기 4대가 파손된 채 미군기지로 귀환하다 착륙 도중 폭발하기도 했다. 소련 공군은 이날을 한국전 참전 사상 최고의 날로 꼽고 있다.

소련은 50년 11월부터 53년 6월까지 2년7개월 동안 공군부대와 고사포부대, 군사고문단과 교관 등 모두 7만2천여명을 참전시켰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직전 북한에 있던 군사고문단을 모두 철수시킬 만큼 한국전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국이 알지 못하도록(나중에 미국은 이를 알았지만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 지도부, 모두 제3차대전 발발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보를 보내더라도 가명(필리포프나 핀시라는 이름을 씀)으로 보내거나 다른 사람(그로미코 당시 소련 외무차관 등)의 이름으로 보내곤 했다. 미국과의 3차대전이 그만큼 부담스러웠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련이 참전한 것은 중국과 북한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50년 10월19일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 소속 지상군 수십만명이 북한땅에 들어왔지만 이들의 공군은 유명무실했다. 보유 전투기라야 구형 미그 전투기 10여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측은 보급물자 수송을 엄호하기 위한 소련 공군의 참전이 절실했다. 스탈린은 중국이 10월 중 참전을 결정하면서 공군 참전을 요청받았지만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우려, 일단은 거절했다. 그러나 중국의 지상군이 전세를 만회한 50년 11월, 2개 항공사단과 2개 고사포 사단으로 구성된 제64 항공군단을 창설해 중국 동북지방 등에 보내 참전을 시작했다. 항공군단 소속 조종사의 전체 규모는 2,000여명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선양(瀋陽)이나 단둥에서 2개월 정도 훈련을 받은 뒤 51년 1월,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중국 동북지방에 주둔했던 소련 공군 조종사들은 모두 계급장이나 휘장이 전혀 없는 지원군 군복을 입어야 했고 일체의 러시아말 사용이 금지되고 한국말을 써야 했다. 참전 사실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참전 조종사들은 "(조종사들의) 모습은 중국식, 말은 한국식, 정신은 러시아식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인터뷰 참조). 중국은 대외적으로 이들을 '중국인민지원군 러시아계'라고 밝혔다.

소련 공군은 참전 이후 물자수송 보호는 물론 중국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철교, 수풍발전소 등 전략적 시설물을 미군 공습으로부터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다만 중국과 북한 국경 반경 75㎞를 넘지 못하는 등 움직임에 제한을 받았다. 조종사들이 유엔군에 포로로 잡히는 것을 소련측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미군 전투기 공습을 막기 위해 고사포부대도 대거 참전했다. 52년에는 한때 조종사와 고사포부대원들을 합쳐 2만6천여명이 참전하기도 했다. 군사고문단도 개전 직전 246명선에서 전쟁 중에도 162(52년 2월15일)∼152명(53년 5월3일)선을 유지했다.

소련군은 전쟁 기간 중 유엔군 전투기 1,309대를 격추시켰다. 공중전을 통해 1,098대, 고사포로 211대를 각각 떨어뜨렸다. 특히 원자폭탄을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B29 폭격기를 200대 격추시켰다. 이는 미군의 전체 보유 대수의 3분의 1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미군은 B29를 '날아다니는 성채'라고 치켜세웠지만 소련 공군 조종사들은 '날아다니는 헛간'이라고 비웃었다. 한번 포탄이 명중되면 헛간처럼 잘 타올랐기 때문이다.

소련측은 참전 중 전투기 335대가 격추됐고 이 과정에서 조종사 135명을 비롯, 모두 299명이 전사했다. 52년 이후 피해가 급증했다. 신참 조종사들이 대거 한국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이들 소련군 전사자는 중국 다롄(大連)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참전 소련군들은 그러나 귀국 열차에서 한국전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극도의 보안유지를 상부에서 지시했던 것이다. 그들이 그나마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 구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탄생하면서부터였다. 홍인표 기자iphong@kyunghyang.com


*증언 6.25 /舊蘇조종사로 참전 크라마렌코 예비역 소장 - "美전투기 1,309대 격추시켰다"

한국전쟁에 조종사로 참전한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예비역 소장(참전당시)은 "우리는 미군 전투기 1,309대를 격추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주간지 블라스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 복장을 하고 비행 도중 동료 조종사들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한국말로 대화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탑건(일류 조종사)'들로 구성된 이들 소련군 조종사의 한국전 참전 사실은 최근에서야 단편적으로 알려졌다. 소련 당국이 한국전 개입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위해 보안유지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계기는.

"1950년 10월쯤, 모스크바 근교 기지에서 편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공군사령부 부사령관이 찾아와 기지내 2차대전 참전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조선 전쟁에 참전하고 싶으냐'고 의사를 물은 뒤 뽑았다. 최신예 미그15 전투기를 화물열차에 싣고 7일 만에 중국 동북지방에 도착했다. 선양(瀋陽)에서 2개월 동안 북한 조종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은 뒤 전투기는 북한에 넘기고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단둥(丹東)으로 갔다. 그 곳에는 새 전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 무슨 임무를 받았나.

"우리들의 임무는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것은 물론 그들의 폭격을 미리 막는 것이었다. 우리 전투기는 위장용 착색도 하지 않았다. 태양빛을 받아 알루미늄 냄비처럼 반짝였고 멀리서도 쉽게 보였다. 미군에게 우리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처음에는 한국말로 대화를 했지만 너무 불편해 하는 수 없이 러시아말을 사용했다. 미군은 우리의 대화를 모두 녹음했지만 미군 지휘부는 소련참전 사실을 감추고 싶어했던 것 같다"

-소련군의 피해가 미군보다 몇 배나 크다는 미국측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전쟁 기간 동안 1,309대의 미군기를 격추시켰다. 그 중 B29는 200대였는데 이는 전체 미군 보유 대수의 3분의 1이나 됐다. 당시 B29는 원자탄을 나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이런 피해를 결코 인정한 적이 없다. 우리는 335대의 비행기와 135명의 조종사를 잃었을 뿐이다"

-위험할 때도 있었나.

"실제로 격추된 적이 있다. 낙하산으로 착륙했는데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골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농부가 보였다. 나는 그동안 배운 한국어로 더듬더듬 말했다. '소련 조종사다. 북한이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것을 돕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김일성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그는 말귀를 알아듣고는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주었다" 김철웅 기자kimseoul@kyunghyang.com


*中.蘇 불화.반목 위험수위

소련과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진영을 이끈 두 개의 축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자료를 살펴본 결과 양국간 불화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전쟁 도중 현안이 생길 때마다 인편이나 전보를 통해 협의를 하기는 했지만 이견이 잦은 탓에 반목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오는 1953년 3월5일 스탈린이 세상을 뜬 이후 공개석상에서 여러 차례 스탈린을 비난했다. 그가 "스탈린의 조선전쟁에 대한 결정은 큰 잘못이었다. 100% 잘못이었다"고 밝힌 것도 밑바탕에는 대만해방 대신 조선해방을 선택한 스탈린에 대해 불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51년 7월10일 시작되는 휴전협상을 앞두고 휴전을 바라는 마오와 계속 전쟁하라는 스탈린간의 불화가 여러차례 있었다. 마오는 "더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며 미국측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반면 스탈린은 "답답한 쪽은 미국인데 왜 우리가 서두르느냐"며 몰아붙였다. 결국 김일성 수상과 중국측 대표인 가오강(高崗) 동북군구사령관이 51년 6월13일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중국측의 전황이 힘들다고 간청, 휴전협상을 하라는 승인을 겨우 얻어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협상이 시작된 뒤에도 "진지 방어전을 계속하라"고 독려, 전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휴전협상이 스탈린 사후 급진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소련은 중국과 북한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바라면서도 물리적인 개입은 최소화했다. 중국의 장비 요청이나 공군 지원도 가능한 한 수량을 후려쳐 제공하거나 주더라도 꼬박꼬박 돈을 쳐서 받았다.

소련은 전쟁 기간 중 중국에 64개 육군사단(고사포부대), 22개 공군사단(전투기)의 무기와 장비를 제공했다. 그러나 중국군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인 51년까지는 16개 사단 규모의 무기가 들어오는 데 그쳤다. 나머지 44개 사단 규모의 무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54년까지 3년에 걸쳐 중국에 인도됐다.

중국측은 "우리는 사력을 다해 인력과 재력을 투입하는데 소련은 돈을 받고 무기를 팔았다"며 전쟁기간 동안 불만이 쌓여갔다. 중.소분쟁의 씨앗은 이때 뿌려진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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