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50년> (16)풀리지 않은 의혹
[경향신문]|2000-08-30|13면 |45판 |특집 |인터뷰 |4854자
* 日 극비 참전했다일본 해상보안청(오늘날 해상자위대의 전신)의 오쿠보 다케시(大久保武雄) 장관이 1950년 10월6일, 시모노세키의 해상보안청 전용부두에 나타났다. 당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시작하던 때였다. 오쿠보 장관은 한국전쟁에 사실상 참전(또는 참가라고도 할 수 있음. 일본은 당시 미국의 점령하로 전쟁에 직접 참전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하는 소해정(바다에 뿌려진 기뢰를 제거하는 배)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일본 소해부대가 한국전에 참가한 까닭은 미군의 원산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미 제10군단은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동부전선의 원산에 상륙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산 앞바다는 북한이 부설한 기뢰가 많아 기뢰 제거를 위한 소해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미 극동 해군은 소해정이 10척에 불과한 반면 일본 해상보안청은 100여척의 소해청으로 구성된 소해부대가 있었다. 미군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근해에 투하한 기뢰를 제거하면서 일본의 소해정 운용수준은 세계 최고수준급이었다.
오쿠보 장관은 이에 앞서 10월2일, 미 극동 해군 부참모장 알레이 버크 소장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나 일단 거절한 뒤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를 찾아가 이를 보고했다. 요시다 총리는 "존 덜레스 미 국무부 대일강화담당 고문이 와서 강화조약 교섭에 들어간 마당에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면 강화조약을 맺을 기회를 놓친다"며 "다만 소해작업에 참가한 사실이 알려지면 국내적으로 문제가 되니 극비에 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독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강화조약(결국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마무리됨)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참전은 극비였다. 2차대전때 패망한 일본은 헌법상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점령군의 요청에 따라 적극 지원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 것이다.
10월4일, 한국전에 참가할 특별 소해부대가 편성을 마쳤다. 최고 지휘관에는 해상보안청 항로계개부장(航路啓開部長)인 다무라 히쿠조(田村久三) 전 해군 대좌가 임명됐다. 출동선박은 소해정 20척을 비롯해 순시선 4척, 시항선(試航船.안전운항을 확인하는 배) 1척 등 모두 25척이었고 참가인원은 총 1,204명이었다. 이들은 그해 12월15일 해산할 때까지 2개월 동안 원산,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앞바다에서 기뢰제거작업 등에 투입됐다(지도 참조). 이와 함께 시항선인 소에이마루(桑榮丸)는 이듬해인 51년 4월6일부터 52년 6월30일까지 인천, 목포, 여수, 마산, 부산, 진해 항로의 안전운행을 확인해주는 작업을 수행했다.
일본 소해정 8척이 처음으로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원산으로 떠난 것은 10월8일 오전 4시였다. 10일 아침, 원산 앞바다에 도착한 이들은 이튿날인 11일부터 소해작업에 들어갔다.
10월12일, 기뢰제거작업을 하던 한국 해군의 소해정이 기뢰를 건드려 폭발하고 말았다. 사망 12명에 부상 92명이었다. 이 사고로 작업이 일시 중지되었다가 17일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 소해정 14호함이 기뢰에 부딪쳐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가 숨졌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상보안청 소속과는 별도로 미군에 고용돼 미군 함정에서 소해작업을 하던 일본인 2명도 숨졌다. 당시 원산 소해작전에서 미군 소해정 2척, 한국 소해정 2척도 침몰했다. 이밖에 10월27일, 군산 앞바다에서 작전을 하던 소해정 30호가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는 사고가 있어났다. 그외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
물론 한국전에 참가한 일본인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앞서 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일본의 고베와 사세보항, 그리고 부산항에서 상륙작전에 투입될 미군을 수송한 수륙양륙정(LST) 47척 가운데 37척을 일본인 승무원이 조종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전때 얼마나 참전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딱 잘라서 참전, 불참전을 나누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수만명이 한국전에 직접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이들 소해부대 인원을 주축으로 52년 해상경비대가 발족됐다. 이들은 54년에는 오늘날의 해상자위대로 변신했다. 소해부대의 한국전 참전이 일본의 재군비를 앞당기는 데 일조를 한 셈이다. 홍인표 기자 iphong@kyunghyang.com
* 美 세균전 벌였나
1953년 한국전쟁 당시 미국 뉴욕의 한 호텔에서 캠프 데트릭(미국 세균전 연구센터)의 데이비드 올슨 연구원이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당국은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족들이 의문을 품고 중앙정보국(CIA) 비밀문서를 살펴보는 등 노력을 기울인 끝에 94년 재검시를 했다. 올슨 연구원의 두개골에 총알자국이 나 있는 것이 발견됐다. 그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피살된 것이다. 유족들은 그가 평소에 한국전쟁에서의 세균전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1952년 1월부터 거의 1년 동안 한반도는 '세균전 논쟁'으로 떠들썩했다. 공산측은 52년 1월, 미군 비행기가 지나간 곳마다 전염병이 돌고 한겨울에 느닷없이 모기나 벼룩, 파리가 날뛴다며 미국이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프 니담과 같은 대학자가 52년 3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국제조사단으로 참가, 북한은 물론 세균전 흔적이 있다는 중국 동북지방까지 둘러보았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그해 5월부터 북측에 포로로 잡힌 미군 전투기 조종사 25명이 '세균전을 벌였다'고 자백한 내용을 기사로 상세하게 다루었다.(물론 이들 조종사는 종전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이같은 진술을 뒤집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세균전을 했단 말인가. 공산측 주장은 이렇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더욱이 공산측이 휴전회담에 성의를 보이지 않자 일본 731부대의 세균전 노하우를 전수받은 미국이 '간단하면서도 위력적인' 세균전 카드를 활용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한마디로 말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은 52년 3월4일 성명을 발표, 진화에 나섰다. 애치슨 장관은 "북측의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유엔군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떤 종류의 세균전을 벌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국제적십자사나 세계보건기구(WHO)와의 합동조사를 제의했으나 공산측이 "이들 기관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거부한 것은 '옥에 티'.
그러다가 최근 세균전 공방이 다시 물위로 떠올랐다.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 사학과 스테펀 엔디콧.에드워드 헤이거먼 교수가 '미국과 화학전'이라는 저서를 통해 "미국이 1951∼53년 한국과 중국에서 극비 세균전을 벌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들은 여러 자료와 관련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50년 10월, 세균전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예하부대에 지시했으며 51년 10월 구체적인 작전단계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물론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찬성보다는 반론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미군 조종사들의 자백이나 중국측이 내세운 자료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공산측이 전형적인 선전선동전술로 세균전을 들고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세균전 공방의 진실은 결국 역사학자들의 영원한 숙제로 남겨야 할 것인지…. 홍인표 기자
*증언 6.25 /지갑종 유엔한국참전국협회 회장 - "舊일본군 출신들도 동원됐다"
지갑종(池甲鍾.73) 유엔한국참전국협회 회장은 한국전쟁 관련사료를 개인적으로 많이 소장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 지난해에는 한국전 당시 소해작전을 벌였던 지휘관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미국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 아닌 참전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한국전의 '준 참전국'이라는 것이 지회장의 설명이다. 지회장은 한국전 당시 로이터통신 종군기자로 일했고 1962년 협회를 창설, 16개 참전국 및 5개 의무대 파견국 등과 유대 강화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전에 참전했나.
"일본은 한국전쟁 25주년인 75년까지 한국전 참전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75년부터 비로소 한국전에 '참전 아닌 참전'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일본 해상보안대는 미 극동 해군의 요청에 따라 공산군 기뢰 제거를 위한 소해작전에 동원되어 참가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미국이 일본지원을 요청한 것은.
"당시 일본의 소해작업 수준은 세계적이었다. 일본 해군은 패전으로 해체되었다가 해상보안대로 부활했다. 그것은 미군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부활된 뒤 5년동안 일본 앞바다의 미군 투하 기뢰를 제거하면서 엄청난 노하우를 쌓았다"
-실제 참전한 일본인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일본의 참전인사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다가 우리의 재향군인회와 비슷한 조직인 해상자위대 출신 모임인 '스이교가이(水交會)'의 99년 회장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해주 앞바다 소해작업을 했던 오카 료헤이(大賀良平.77)임을 알아냈다. 오카 당시 회장은 한국에서 일본 소해정이 평화를 위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찾아와준 것에 감사했다. 그들은 평화에 기여하는 데 노력했다는 걸 자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해정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많이 참전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미군이 한국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철도나 해상수송, 통신 등에 모두 구 일본군 출신들이 참전했다. 일제시대 수풍댐에 근무했던 일본인 엔지니어는 당시에 일당 2만엔의 많은 돈을 받고 수풍댐 폭격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판정하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
-일본이 한국전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요시다 당시 총리는 '천우신조'라고 했다. 하늘의 도움이라는 뜻이다. 패전의 바닥에서 일어선 것이 바로 한국전 때문이었다. 잃은 것은 참전군인 몇명의 목숨이었을 뿐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홍인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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