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따듯하던 날씨가 눈발을 뿌리더니 전국을 하얗게 눈으로 덮어 놓았다. 그리고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영하 10도, 칼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간다. 눈이 온지 일주일이 돼 가지만 멀리 보이는 월악산은 물론이고 가까이 충주 남산과 논밭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다. 길가 가로수에도 눈꽃이 피었고, 길가에도 눈이 수북이 쌓여있다. 사무실의 창을 통해 보는 충주 교외의 풍경은 그지없이 평화로운 모습이다.
62년전 이맘때에도 한반도에는 맹렬한 추위가 몰아치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평화롭지 못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 북한의 함경도 개마고원은 영하 40도에 그야말로 살을 에이는 칼바람(블리자드)이 살아있는 것을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온 15만 명의 중공군이 개마고원 한가운데 있는 장진호를 중심으로 계곡에 새카맣게 매복하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헤 서울을 수복한 후 힘차게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국 해병1사단 2만 5000명을 전멸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1월 27일, 장진호에 들어온 미 해병1사단은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당했다.
미 해병1사단은 1941년에 창설돼 제2차 세계대전(과달카날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고, 한국전 이후에는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에 참전해 현대의 지구상 거의 모든 전쟁에 참전한 최정예 부대다.
드디어 사정권 안에 들어온 미 해병을 향해 중공군 15만 병력의 화력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공군 하면 인해전술을 떠올리고 허술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과 화력으로 미군을 공격했다. 미 해병사단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지형적으로 고립당한 불리한 상황이라 사실상 사단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거기다가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의 영하 40도에 가까운 맹렬한 추위는 미군을 더욱 곤경에 빠트렸다. 전투로 인한 사상자에 동상자가 속출해 전투로 인한 사상자보다 동상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땅도 얼어붙어 참호를 제대로 팔수가 없었고, 총기나 수류탄, 야포 등의 무기까지도 강추위 때문에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불발이 되기까지 해 어려움은 더해만 갔다. 마침내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후퇴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 후퇴명령은 부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전투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만든 세계전투사에 유명한 말로 남아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미해병1사단 장병의 용맹과 부대장의 현명한 판단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전황은 미군측에 유리하게 전개돼 갔다. 드디어 미 해병대는 전우의 시체까지 챙겨가며 1950년 12월 13일 흥남까지 철수에 성공한다. 이후는 1·4후퇴로 이어진다.
미국은 당시 장진호 전투를 진주만 피습이후 가장 치욕스러운 패배라고 했지만 현대의 전쟁사가들은 성공한 전투로 평가한다. 미 해병대 1사단은 2만 5000명 중 4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해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지만, 중공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미군보다 10배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해 이후 중공군이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우리 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재 반격할 여유를 갖출 수 있었고 민간인도 흥남부두를 통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전투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더불어 가장 치열한 동계 전투로 꼽힌다. 이후 미국은 최신예 이지스 순양함에 '장진호'라 이름을 붙였고, 미국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공원 내에 야전우의를 걸치고 경계태세를 하고 서있는 미군 동상들은 장진호 전투에서 초계 근무 중인 척후병들의 모습이다.
태평양 건너 머나먼 한국땅, 혹한의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해병 제1사단 장병을 비롯한 첨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사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