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극동군 총사령관이자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미 제국주의의 화려함을 온몸으로 웅변해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일본, 필리핀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그는 1880년 아칸소주 리틀록에 있는 병영에서 태어났다. (이승만보다 5세 연하)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도 유명한 장군이었다. 그의 어머니 핑키는 남편의 진급을 위해 뛰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 교육에도 극성스러울 정도록 열성적인 여인이었다.

맥아더는 셋재 아들이었다. 큰 형은 해군 대령으로 죽었고 작은형은 유년기에 죽었다. 더글라스는 가장 탁월한 아들이었다. 그는 미 육사에 수석 합격했고, 미 육사 역사상 최초로 올A(최우등)로 졸업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4개월동안 13개의 훈장을 받을 정도록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는 1919년에 귀국해 미 육군 역사상 최연소(39세) 육사 교장이 되었다. 이듬해에 또 최연소로 정규준장으로 진급하였다.(그 전에는 임시 준장) 그 후 그는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 주둔 부대로 전출하였다. 그는 필리핀 근무중인 1922년에 42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으나 8년 후 신문들이 아내의 염문 스캔들에 대해 써대자 8년 후 이혼했다.

맥아더는 그의 나이 50세인 1930년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때에 아이젠하워와 패튼이 소령 계급을 달고 그의 참모로 근무하였다. 맥아더는 35년에 퇴역해 필리핀으로 가서 사실상의 군사총독노릇을 했다.

맥아더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인 37년 57세의 나이로 19세 연하인 진 마리 페어크로스와 재혼했다. 결혼생활은 원만했다. 그는 애처가를 넘어 공처가였다.

1940년 부터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미 육군은 퇴역한 맥아더를 다시 현역 대장으로 복귀시켜 필리핀에 미 극동지상군을 창설했다. 맥아더는 그 사령관 자격으로 일본에 승리했고 이어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맥아더는 194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부재자로 출마해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적이 있다. 같은 공화당원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된 존 포스터 덜레스는 한국전 초기 동경에서 맥아더를 만나고 온 뒤 트루먼을 만나 맥아더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소환을 건의했다고 한다.

결국 맥아더는 51년 4월 11일 투루먼에 의해 해임당했다. 맥아더는 별 다섯 개의 종신 원수로서 전역을 신청하지 않는 한 원수 계급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해임 즉시 전역을 신청했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트루먼이 아마 정신질환 때문에 자신을 해임했을 거라고 털어 놓았다지만 나중에 리지웨이는 맥아더에게 정신질환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다고 한다.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경력 때문이었을까? 맥아더의 보좌관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맥아더가 언제나 성공에 대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다분히 과대망상적인 기질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실패의 위협에 직면할 때마다 번번히 권총으로 자살해 버리고 말겠다는 위협을 주위에 하곤 했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여러 차례 잠자는 자신을 깨워서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한번은 제발 좀 자자고 화를 냈더니 맥아더는 그 다음 날 사과했다고 한다.

트루먼을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했다. 선글라스, 옥수수 파이프, 팽팽한 모자, 잘 다린 바지 등으로 상징되는 맥아더 특유의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맥아더 전기를 쓴 마이클 샬로는 인간적으로 볼 때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이기적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한국에서는 영웅이었다. 1964년 4월 6일 맥아더가 84세로 사망하자 조선일보는 "한국전쟁의 영웅이며 또한 비율빈 해방의 은인이었던 맥아더 원수의 서거를 못내 슬퍼한다."는 애도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한국 통일의 절호의 찬스가 맥아더의 해임으로 유실되었다면서 그의 주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애달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만이 독점한 원폭으로서 기선을 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끝내 만성적인 비운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는 끔찍한 말도 덧붙였다.

한국인의 맥아더 숭배는 조선일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 유명 재야인사는 4.19 혁명 당시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위대 속에서 누군가가 "맥아더 장군께 가자"라고 외쳐 인천까지 가서 맥아더 동상에 헌화했다고 한다.

맥아더 숭배는 90년대 까지 계속되었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신 무당도 여전히 많았다. 1996년에는 대통령 김영삼이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조선일보의 64년 사설 내용과 똑같은 취지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8년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규환이 인천 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2003년 7월 27일 정전 50주년을 맞이해 7월 24일 UPI통신이 내놓은 <한국전의 잊혀진 교훈>이라는 제목의 논평 기사는 트루먼과 맥아더 등 한국전을 주도한 전쟁 수뇌부는 당시의 커다란 실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공산화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잘못 평가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휘하 병력 훈련에 만전을 기하지 않아 전쟁 초기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거의 전부를 북한군에 내줬고 중공군의 대규모 진격을 예상하지 못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높게 평가된 반면, 그의 후임인 유엔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는 전공에 걸맞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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