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혁명 계획의 핵심은 1961년 4월19일 혁명 1주년 기념일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할 것이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수도권의 부대들이 폭동 진압에 동원되면 이미 포섭한 장교들에 의해서 이 부대가 쿠데타 군으로 돌변,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전제가 되는 것은 4월19일에 과격한 학생 시위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 모의 세력은 학생들을 포섭하여 시위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른바 ‘데모 유치 공작’을 꾸민다. 이 공작 이야기는 일종의 公刊社(공간사)인 《韓國軍事革命史(한국군사혁명사)》(1963년 8월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발간·위원장 장경순 소장)엔 빠져 있다. 이 혁명사의 원본이 된 비공개 <革命實記(혁명실기)>엔 적혀 있고, 이낙선의 <혁명 참여자 증언록>엔 자세히 그 경과가 실려 있다.
혁명사가 발행될 때는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대결한 제5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앞두고 있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내용을 빼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졸업을 앞둔 육사 17기 생도들 가운데서도 쿠데타 계획을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한 장교가 주동 생도를 찾아가서 “야, 좀 기다려. 우리가 다 준비하고 있어” 하고 말렸다. 정부가 무능하고 만만하게 보이니까 생도들까지 정권 탈취를 꿈꿀 정도였다.
그때 장면 총리가 여러 차례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 보고를 받고도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로 민간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군사 쿠데타에 의한 집권’이란 개념이 아예 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조 개국 이후 정치를 독점해 온 문민 정치인들의 입장에선 군인에 의한 정변은 외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2세기 고려 무신의 난이란 단 한 번의 군사정변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정치 생리에 비추어 군인이 무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 바깥에 존재했다.
박정희는 근대화, 즉 경제 발전을 핵심 목표로 하는 혁명을 추진한 점에서 특이하다. 박정희는 1951년 6·25 동란 중에 이미 “공산화를 막기 위해선 빈곤 퇴치뿐이다”고 말하곤 했다.
5·16 혁명의 특이점은 민간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도 아닌 군인이 경제 개발을 혁명의 중점 목표로 설정한 점이다. 박정희는 정치적 문제의 근본이 경제라는 점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때 사회주의에 傾倒(경도)되었다가 배우고 나온 점이 하나 있다면 ‘경제란 하부 구조가 정치, 문화 등 상부 구조를 지배한다’는 시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