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 정조 이산

from 좋은글모음 2020. 10. 6. 10:26

정조도 세종만큼이나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이단적 사상’과 새로운 문체를 공격했다. 왕의 뜻을 따라 정통 주자학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은 모두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새로운’ 주제와 문체를 추구했던 이들은 모두 가난한 선비로 살아야 했다. 
 
 그 가난하고 인정 못 받은 선비 중에는 박지원이 있었다. 정조는 박지원의 저작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오늘날 문풍(文風)이 이와 같은 것은 그 근본을 캐 보건대, 박모의 죄가 아님이 없다.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숙람(熟覽)하였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으랴? 이 사람은 그물을 빠져나간 가장 큰 사람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돌아다닌 후에 문체가 이와 같아졌으니, 마땅히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또 “명·청 이래의 문장은 난해하고 괴이하며, 뾰족하고 시큼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면서 “성균관과 유생들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와 관계되는 말이 있으면, 주옥같은 작품이라도 가장 낮은 점수를 주라”고 명했다. 그런 정조에게 새롭고 신선한 생각과 문체가 그득한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야말로 ‘쓰레기’였을 것이다. 
 
 정조는 조선에 새로운 기류가 흘러드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던 사람이다. 개혁군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고주의 군주였던 것이다. 조선이 쇄국과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정조 때부터였던 지도 모른다. 세목(細目)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조선을 통틀어 몇 안 되는 걸작으로 손꼽히는 <열하일기>를 푸대접했다면 분명 안목이 뛰어나거나 새로운 시대를 향한 열망이 강했던 왕은 아니었다. 
 
 사족을 달자면 세종은 한글, 당태종은 <정관정요>으로 기억되는 태평성대를 남겼다. 반면 정조는 자기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을 탄압했다. 
 
[출처] 역린 / 정조 이산|작성자 msyu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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