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에 이어 53년과 62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특히 53년과 62년에 화폐단위를 일정비율로 떨어뜨리는 디노미네이션을 병행했습니다.특히 62년 6월 10일 박정희 정권의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추진된 제2차 디노미네이션은 5·16 군사쿠테타 직후 불안 심리로 장롱 속에 묻혀있는 자금을 경제개발 자금으로 양성화한다는 목적으로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당시 이 조치로 자금유통이 경색되고 기업 활동이 위축되자 시행 한 달만인 7월 13일 별도의 특별조치법으로 완화시켰습니다.
박정희의 화폐개혁,
화폐 개혁을 이틀 앞둔 62년 6월7일 재무부는 영국에서 인쇄해온 신화폐를 교환소까지의 운반은 정보부와 군대가 맡도록 했습니다.천병규 재무장관은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에게까지 비밀을 유지했을 정도였습니다.박정희 의장은 사뮤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에게는 48시간 전에 통보했다고 합니다.최고회의 의장실에 불려온 버거 대사에게 통화개혁의 지휘자인 유원식 위원은 "선물을 하나 주겠는데 맞추어보시오"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버거 대사는 "내각 총사퇴인가?"라고 했다. 박정희 의장이 "통화개혁을 한다"고 했을 때 버거 대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잘하는 일"이 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순진한 유원식은 이런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 여 나중에 기자들에게 "통화개혁에 미국 대사도 찬성했다"고 말했다. 버거대사는 이때 속으로는 "어디 두고보자"라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5·16이란 군사쿠데타도 미리 탐지하지 못했던 미국 대사관으로서는 통화 개혁이란 경제 쿠데타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심히 상했을 것이다. 더구나 거액의 원조를 제공해 온 미국으로서는 원조 수혜국의 '멋대로' 에 배신감까지 느낄만했다. 천병규 장관도 같은 시간에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을 방문하여 통화개혁을 통보했다.
박정희 의장은 1962년6월9일 밤10시에 공표된 통화개혁(10일 0시부터 발효)에 즈음한 담화에서 '부정부패 등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이 상당 히 온존해 있으나 이는 산업자금화나 장기저축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서 '누증된 통화량은 언제든지 투기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악성 인플레의 요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박의장은 이어서 '음성자금과 과잉구매력을 진정한 장기 저축으로 유도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인플레를 방지하는 조치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이 통화개혁은 화폐단위인 '환'을 '원'으로 바꾸면서 화폐가치만 10 대 1로 평가절하한 것이 아니었다. 박 의장의 담화는 이 화폐개혁의 진정한 목적이 화폐교환 때 노출되는 음성자금을 은행에 장기저축 형식으로 붙들어둔 뒤 이를 투자재원으로 동원한다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의 침해인 것은 물론이고 보는 이들에 따라선 국가자본주의적인 발상이란 비난을 들을 만도 했다.
박정희 의장은 10일 아침 재게의 거물 이병철 삼성 사장을 불렀다.
"어젯밤 방송 들었지요?"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조달에는 이 길밖에 없다고 하여 단행한 것입 니다. 극비리에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최고회의 안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새 지폐는 천병규 장관이 영국에서 인쇄했습니다." "신화폐의 교환을 위해서 날마다 수백만 명이 은행창구에 줄을 서야 하므로 그 원성이 모두 정부에 돌아갈 것이고 국민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에너지의 낭비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화개혁은 해만 남겼지 성공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서독은 워낙 인플레가 심해 그 수습 책으로 통화개혁을 단행했었지만 한국의 사정은 다릅니다. 큰 돈 가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경제인의 의견도 사전에 들을 걸 그랬군요.".
대화중에도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개혁에 대한 각계의 반 응들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난감한 표 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치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데···무슨 다 른 방도가 없을까요.".
이병철은 "전면 해제가 어려우면 기술적으로 풀어가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뒤 물러나왔다.
화페개혁에 대한 미국의 저지 공작 .
최근 비밀등급에서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를 보면 사뮤엘 버거 미국대사는 1962년 6월7일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통화개혁에 대한 통보를 받은 바로 그날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국무부에 올렸음을 알 수 있다. '통화 개혁은 부정축재에 대한 징벌적 처리의 성격을 갖고 있고 정부에 대한 기업의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에 5개년 계획에도 지장을 줄 것이다' 는 분석이었다. 미 국무부의 인식도 같았다. 생산공장에서 사업자금을 상당기간 빼내 동결시키는 것은 위험하고 기업인들에게 무거운 자본과세를 하는 것으로 비쳐져 외자 도입에도 이로울 것이 없다는 시각이었다. 이미 때가 늦어 통화개혁을 중단시킬 수는 없으니 통화개혁의 규모를 축소시키고 동결예금을 빨리 해제시키도록 하라는 것이 버거 대사에게 떨어진 워싱턴의 지침 이었다.
6월10일을 기해 단행된 통화개혁은 과격한 조치들을 담고 있었다. 당장 첫날부터 100환 이상의 화폐 유통을 금지시켰다. 50환 이하의 소액 화폐는 7월10일까지 신화폐와 병용하도록 했다.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금융기관의 예금 등 금전채무의 지불을 6월17일까지 전면 금지시키고 구권을 예입한 세대에 한해서 1인당 500원씩만 신권으로 바꾸 어주고 나머지는 강제저축시킨 조치였다. 돈은 돌아야 하는데 그 유통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켰기 때문에 사회가 대혼란에 빠졌고 경제활동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6월10일 한국은행에서는 한미간 대책회의가 열렸다. 사뮤엘 버거 주 한 미국대사는 하비브 정치참사관, 파파노 경제참사관, 킬렌 유솜(USOM· 대한원조기관)처장, 유솜의 호이저 박사를 데리고 왔다. 한국측에선 유원식 최고회의 재경위원, 천병규 재무장관, 민병도 한은 총재, 통화개혁 준비팀의 실무책임자 김정렴이 참석했다. 버거 대사는 "사전에 우리쪽에 아무런 통보나 협의가 없었던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통화개혁 조치의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을 평가한다"고 했다. 유원식 위원은 "보안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딴 뜻은 없었다"면서 "6월16일부터 실시하게 될 긴급 통화조치에 대해서는 미국측과 충분히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버거 대사의 표정도 많이 풀어졌다.
이 자리에 있었던 김정렴은 1953년 통화개혁을 할 때 참여한 경험에서 미국 원조당국과의 사전협의가 성공의 한 요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정희 의장에게 통화개혁계획을 보고할 때도 이 점을 강조했고 유원식 위원도 "알았다"고 긍정했는데 사태가 이렇게 된데 대해 놀랐다고 한다(회고록 '한국경제정책30년사').
6월16일 오후 최고회의는 본회의를 열고 화폐교환 때 은행에 예입된 동결자금의 처리기준을 담은 '긴급통화조치법'을 통과시켰다. 법은 통과 되었지만 최고위원들은 사전에 아무 협의를 받지 못한 데 대해서 유원식 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재경위원장 김동하 조차도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원식은 미국측과도 미리 약속해둔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원식은 생전에 펴낸 회고록에서 '미국 대사관에서 나에게 수없이 면담을 요청해왔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이날의 긴급통화조치법에 따라 화폐교환 때 은행에 예탁된 돈과 그 이전의 예금에 대하여 일부를 봉쇄계정으로 돌려 정부가 강제로 산업자금으로 동원하게 되었다. 봉쇄율은 6개월 이상 1년 미만의 저축성 예· 적금일 경우예입금의 100분의 35, 기타 예금일 경우 천만원 이상은 전액 을 봉쇄계정으로 돌려 동결하는 식으로 예금의 성격과 기간에 따라 일정 한 비율을 정해놓았다.
동결된 봉쇄계정의 자금은 6개월 이내에 설립될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으로 대체된다. 이 돈은 또 한국은행의 특별지불준비금으로 예치되고 예금주에게 연 15%의 이자를 지급하기로 했다. 문제는 봉쇄대상이 된 자금 이 약 970억환으로서 예상보다도 적었다는 점이다. 유원식이 이런 식의 통화개혁을 발상하여 박정희 의장을 설득시킬 때 그는 "통화량의 약3분 의 1은 화교들이 가지고 있고 그 규모는 1,000억 환에 이를 것이다"고 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음성자금도 화교자금도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 되었다.
정부는 봉쇄금액의 50%까지는 예금주에게 융자해주기로 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했으나 이 강제조치의 충격은 너무 컸다. 자금의 흐름이 막힌 관계로 가장 빨리 타격을 받은 것은 중소기업이었다. 약1만7,000개의 업체를 거느린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집계한 가동률에 따르면 통화개혁이 실시된6월10일의 가동률을 100으로 했을 때 6월20일의 그것은 42.5% 에 불과했다.
미국은 단호하게 나왔다. 한번도 통화개혁을 해본 적이 없고 사유재산권을 신성시하는 미국인에겐 국가에 의한 민간 자금의 강제동원이란 발상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생각이 박히게 되어 있었다. 먼저 미국정부는 버거 대사를 통해서 기한 1년 미만짜리 예금의 일부를 동결한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를 박정희 의장에게 전달했다. 김정렴은 서독 통화개혁의 비슷한 사례를 정리하여 미국측에 설명했으나 미국측은 "서 독의 경우는 국제금융기관과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면서 납득하지 않았다. 박정희 의장은 김정렴에게 "전체 봉쇄계정의 15% 를 차지하는 1년 미만 예금에 대한 봉쇄는 해제해주도록 하라"고 지시했 다. 미국의 압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모든 봉쇄계정 의 해제를 요구해왔다.
킬렌 유솜 처장은 온건파인 상공부 정래혁 장관을 만나 이념적인 관 점에서 통화개혁을 비판했다. <이번 통화개혁은 한국경제를 국유화, 통제경제의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 미국 의 원조가 쓰여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생산활동은 위축될것이다.>.
6월21일 미 국무부의 에드워드 라이스 차관보는 정일권 주미 한국 대사를 불러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존중해왔다"면서 "같은 맥락에서 미국도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전제한 다음 "만약 (한국을 돕고자 하는) 미국의 노력이 무효화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대한원조정책을 재고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통화개혁을 통해 강제동결시킨 예금을 풀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는 뜻이었다. 정부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던 혁명정부로서는 손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김정렴은 모든 봉쇄예금액의 3분의 1을 자유계정으로 풀고 나머지 3분의2는 기한 1년의 정기예금계정으로 전환한다는 특별조치법안을 기안하여 최고회의에 올렸다. 7월13일 이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강제동결된 자금을 기반으로 하여 산업개발공사를 설립, 5개년 경제 개발계획에 매진한다는 통화개혁의 목적은 사라졌고 화폐단위를 '환' 에서 '원'으로 바꾸고 화폐가치를 10분의 1로 바꾸는 데 그치게 되었다. 최고회의는 통화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동하 재경위원장을 외무국방위원장으로 돌리고 통화개혁의 발상자인 유원식 위원을 사임 시켰다. 그 전에 송요찬내각수반과 천병규 재무장관은 증권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었다. 이로써 통화개혁에 관계했던 요인들이 모두 거세된 것이다. 그러나 통화개혁에 반대했던 김정렴은 그 뒤 중용된다.
통화개혁의 실패는 박정희가 집권한 뒤 처음으로 겪은 위기였다. 많은 위기가 그렇듯 그 속에는 호기가 숨어 있었다. 박정희는 이 실패의 교훈을 오랫동안 기억했기 때문이다. 통화개혁 실패를 통해서 박정희는 내자동원에 의한 민족주의적 경제개발 전략을 단념해야 했다. 동원할 만한 자본축적이 아예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통화개혁은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민족자본에 의한 기간산업 건설과 수출대체 산업건설 같은 발상은 힘을 잃게 되었다. 이 후부터 외자도입, 보세 가공무역, 수출입국 같은 대외개방 노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혁명정부가 통화개혁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구정권 시절의 부정축재자금 등 음성자금을 양성화한다는 것이었다. 도덕적 명분을 앞세운 박정희의 통화개혁 실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 실명제를 사정 차원에서 추진하다가 실패한 것과 비슷하다. 경제를 섯불리 도덕적으로 다룰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는 체험을 한 박정희는 그 뒤로는 경제에 대해서 매우 실용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화폐개혁 실폐이후
이즈음 박정희 의장은 상공부 차관-장관을 지낸 박충훈과 지방시찰중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봉건적인 직업관인 사농공상 의식에 대해서 박충훈은 공, 즉 제조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상공농사를 주장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수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기업인들을 앞세우고 사로 상징되는 지식인들을 뒤로 밀어버리는 정책을 추진한다. 오랜 문민정치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에서 이것은 이단이었고 학생, 언론인, 학자 등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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