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梁君 *인수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이 집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는 검푸른 절벽 아래 있으며 기둥이 여덟개인데, 깊숙한 안쪽을 막아서 *심방深房을 만들고, 격자창格子窓을 통하게 하여 탁 트인 대청을 만들었다. 높다랗게 다락을 만들고 아담하게 곁방을 둔데다 대나무 난간을 두르고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오른쪽엔 둥근 창을 내고 왼쪽엔 빗살창을 내었으니, 집의 몸체는 비록 작아도 있을 것은 다 갖춰져 있어 겨울에는 환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집 뒤에는 배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대나무 사립문 안팎으론 모두 오래된 살구나무와 붉은 과실이 열리는 복사나무다. 개울 머리엔 흰 돌을 두어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세차게 흐르게 했고 멀리 있는 물을 섬돌 아래까지 끌어와 네모난 연못을 만들었다.

 양군은 성품이 게으르고, 깊은 곳에 거처하길 좋아하는데, 권태로워지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오피궤烏皮几 하나, 거문고 하나, 검劒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고서화古書畵 두루마리 하나, 바둑판 하나가 있는 사이에 벌렁 눕는다.

 매양 자다 일어나 주렴을 걷고 해가 어디쯤 걸렸는지를 보는데,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언뜻 옮겨 가고 울타리 아래 한낮의 닭이 처음 운다. 그러면 안석에 기대어 검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 몇 곡조를 타 보기도 하고, 한 잔 술을 조금씩 마시기도 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혹은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고, 혹은 옛 기보棋譜에 따라 바둑돌을 놓는데, 몇 판을 두다가 그만두면 하품이 밀물처럼 쏟아지고 눈꺼풀이 구름처럼 무거워져서 다시 벌렁 눕는다.

 객客이 찾아와 문에 들어오면 주렴이 조용히 드리워져 있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풍경風磬이 절로 운다. "인수! 인수!"하고 서너 번 주인의 자字를 부른 후에야 양군은 일어나 앉아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보는데, 해는 아직도 서산에 걸려 있다.


*주영염수재晝永簾垂齋 - 긴 낮 동안 주렴이 드리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인수仁叟 - 개성 사람 양현교梁顯敎의 자字다.

*심방深房 - 깊숙이 안에 있는 방, 곁방 - 안방에 딸린 방

*오피궤烏皮几 - 검은 염소 가죽으로 싼 궤석을 말한다. 몸을 기대는 데 사용했다.

*다관茶罐 - 찻주전자, 즉 찻물을 끓이는 그릇을 말한다.

*풍경風磬 - 처마 끝에 매다는 작은 종을 말한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려 정취 있는 소리를 낸다.

 연암은 그 스스로도 평생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기에 양인수와 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사회적 비주류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특히 잘 포착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양인수는 연암이 홍국영을 피해 연암협에 은거할 무렵 알게 된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점 연암 스스로도 정말 하릴없음에 몸서리쳤을 터이다. 하릴없는 사람이 하릴없는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 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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