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은 “망루 쌓을 건물 찾는 중”
한겨레21 | 입력 2009.04.10 18:11
[한겨레21] [특집] 참사 난 4구역 외에도 곳곳에 재개발 광풍…
주민·관청·조합·세입자 사이 얽힌 갈등들 폭발 전야
한국 사회에서 땅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되는 공간은 없다. 그러다 보니 땅에는 늘 차지한 자와 쫓겨난 자의 역사가 새겨진다. 서울의 중심이면서 한강과 맞닿은 지리 조건을 갖춘 용산은 땅의 슬픈 운명을 웅변한다.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이 곳에 군사·철도 기지를 세웠다. 황현은 < 매천야록 > 에서 "왜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을 멋대로 점을 쳐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빼앗아갔다"고 적었다. 해방과 함께 용산의 주인은 미군으로 바뀌었다.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등이 들어선 용산 땅에는 미군과 미군속 등 2만여 명이 모여들였다.
주민·관청·조합·세입자 사이 얽힌 갈등들 폭발 전야
한국 사회에서 땅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되는 공간은 없다. 그러다 보니 땅에는 늘 차지한 자와 쫓겨난 자의 역사가 새겨진다. 서울의 중심이면서 한강과 맞닿은 지리 조건을 갖춘 용산은 땅의 슬픈 운명을 웅변한다.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이 곳에 군사·철도 기지를 세웠다. 황현은 < 매천야록 > 에서 "왜인들이 숭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구역을 멋대로 점을 쳐서 군용지라는 푯말을 세우고 경계를 정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번번이 군용지라는 명목으로 빼앗아갔다"고 적었다. 해방과 함께 용산의 주인은 미군으로 바뀌었다.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등이 들어선 용산 땅에는 미군과 미군속 등 2만여 명이 모여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