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철종 5)~?
조선 말기의 정객.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도사(都使)를 지낸 재원(在源)이다. 1890년(고종 27)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키메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등 한국의 고전을 번역했다. 1893년 7월 귀국하던 길에 도쿄[東京]에 머물면서 민씨정권으로부터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파견된 이일직(李逸稙)과 만나 김옥균을 암살하는 일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으며, 이 제의를 받아들여 동지로 가장하여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 대한 박해를 가중하면서 조선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은 일본의 견제세력으로 청을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청나라로 향했다. 김옥균을 수행하여 따라간 그는 1894년 3월 28일 상하이[上海] 미국 조계(祖界) 내의 일본 호텔 동화양행(同和洋行)에서 김옥균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암살 직후 그곳의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교섭으로 상해현령(上海縣令)에게 인도되어 4월 13일 청국 군함 위정호(威靖號)의 호송을 받으면서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양화진(楊花津)으로 귀국했다. 그해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홍문관교리직을 제수받았고, 서울에 사택(舍宅)까지 하사받았다.
1898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가입한 홍종우는 그해 11월 독립협회 지도자들의 체포와 내각에서의 독립협회 해산 의결에 분노한 시민과 독립협회 회원들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법부협판(法部協辦) 이기동(李基東), 과천군수 길영수(吉永洙) 등과 함께 약 2,000명의 보부상을 지휘하여 종로에서 황국협회 대회를 열어, 독립협회에 의해 규탄된 대신들인 조병식(趙秉式)·민종묵(閔種默)을 지지하고 만민공동회를 돕고 있는 민영준(閔泳駿)을 규탄하는 선동 연설을 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길영수와 함께 몽둥이로 무장한 보부상들을 이끌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시민의 민소(民疏)에 의해 재판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고종의 비호로 형이 집행되지 못했다. 1898년말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수구파내각의 의정부총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중에서
-다음 백과사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