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日本의 근대화-1 일본의 개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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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만년삼
- 조회수 : 327
- 08.05.10 11:14
일본의 근대화는 일본의 개항부터 시작된다.
서양 열강이 일본에 다가올 무렵, 일본의 영토는 여러 개의 번으로 나뉘어 있었고 다이묘가 번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 번들을 총괄하는 막부가 실질적인 정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서양 열강이 일본에 접근해 오자 막부는 쇄국 정책을 내세우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외국 선박을 모두 쫓아 버려라!" "외국인 침입자들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죽여라."
처음에는 막부는 이런 포고문을 낼 정도로 서양 열강의 등장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무력을 앞세운 서양 열강의 압력을 계속 받고, 또 중국이 아편 전쟁으로 겪은 일들을 보면서 고민은 점점 커졌다,
"표류해 온 외국 선박에 연료와 식량과 물을 주고 빨리 돌아가게 하라."
막부는 새로운 포고문을 발표했으나, 여전히 개항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던중 1853년 미국의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 제독이 증기선을 포함한 군함 4척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막부는 통상을 반대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두려워 다음해로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1854년 가나가와에서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8년에는 미국 총영사 타운센트 해리스의 강경한 요구로 미일 수호 통상 조약과 무역 장정을 맺었다. 그런데 이 조약은 천황의 허가를 받지 않고 막부가 맺은 것이라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이를 계기로 들고일어났다. 막부는 미국에 이어 영국, 네덜란드,러시아,프랑스와도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제 일본 시장은 서양의 여러 나라에 개방되었고, 막부는 자유로운 무역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면서 일본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많은 금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당시 다른나라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일반적으로 1 대 15.5였으나 일본에서는 1 대 5였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은을 일본으로 들여와 금으로 바꾸어 갔다. 이렇게 외국의 화폐가 들어와 일본의 통화 제도를 혼란에 빠뜨리자 막부는 화폐 개혁을 통해 금화 가격을 한꺼번에 3배나 올렸다. 그러나 이 조치는 혼란을 더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막부는 단독으로 문제를 처리하기가 힘들어졌다. 막부는 대책을 마련하려고 조정과 여러 다이묘 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 등 세력 있는 번들이 천황과 조정을 지지하며 막부와 대립했다. 특히 조슈번은 천황의 권위를 높이는데 적극적으로 나서 막부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한편 조슈번은 서양 열강에 무력으로 저장했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국 연합 함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자신들의 대외 정책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깨달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느껴 소총대를 구성하고 서양 군함과 대포를 사들이며 군사력을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사쓰마 번 역시 나마무기 사건을 계기로 근대화 정책의 필요성을 느꼈다. 1862년 사쓰마 번 다이묘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쓰가 에도에서 교토를 가던 중 나마무기라는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 영국 상인들이 시마즈 히사미쓰 행렬을 가로막자 화가 난 사무라이가 영국 상인들을 공격했다. 일본에서는 세력가의 행렬이 지나가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에서 물러나 엎드리는 것이 예의 였는데 영국 상인들은 이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싸움으로 영국 상인 1명이 죽고 여러명이 부상당했다. 영국은 살인자에 대한 처벌과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사쓰마 번은 거절했다. 이에 영국은 함선 7척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전쟁은 양측의 화해로 끝났지만, 새로운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사쓰마 번은 서양 군함을 사들이고 군사력을 근대화하려고 노력했다.
1864년 일본의 국내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막부가 다른 번들로부터 소집한 군대를 이끌고 조슈 번을 치기위해 나선 것이었다. 조슈 번은 4국 연합 함대에 패한 이후 막부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하는 보수세력이 집권 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슈번은 막부에 복종의 뜻을 비쳤고 막부는 정벌군을 철수했다. 그러나 조슈 번에서 내란이 일어나면서 막부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막부는 2차 원정을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순조롭지 않았다. 사쓰마 번을 비롯한 여러 번이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고, 그동안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계속 투자해 온 조슈 번의 실력도 강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슈 번은 사쓰마 번과 삿초 동맹(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막부 타도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자는 목표에 합의한 동맹)을 맺어 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조슈 정벌의 실패로 막부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고, 결국은 막부는 협력군이 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의해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1867년 12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황궁을 점령하고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정복고를 선포했다. 1868년 '계몽된 지배' 라는 뜻의 '메이지'를 새로운 연호로 선택했고, 당시의 천황은 메이지 천황으로 불리면서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 일본은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