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글을 아는 사람들은 상언,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격쟁을 통하여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가 있었다. 백성들이 꽹과리나 북을 이용하여 억울한 내용을 진술할 수 있게 했다. 정조는 격쟁의 폐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했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서 개혁의 명분을 확보하려 하였다.

1791년 통운교와 경복궁 앞 혜정교, 창덕궁의 돈화문 밖에 있는 파자교 등 세 곳에서 상언과 격쟁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격쟁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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