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의 세계] ③ 莊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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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제물론 (齊物論)
1.원문 읽기
【참다운 진리는 어디에 숨었기에 진짜다 가짜다 하는 논의가 생겨났으며, 참으로 옳은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옳다 그르다 하는 논의가 생겨났는가? 참다운 진리는 어디에 갔기에 있지 않으며, 참으로 옳은 말은 어디에 있기에
현재의 말들이 타당하지 않은가? 참다운 진리는 조금 이루어진 것에 의해서 숨겨졌고, 참으로 옳은 말은 번지르르한 미사여구에 의해
숨겨졌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여 비난하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밝은 진리의 입장에서 상대와 자기를 동시에 초월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 해설; 장자가 비교적 직설적 어법으로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고 있다.
유가(儒家)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덕철학을 말한다.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군자들이 민중을 교화 훈육시키면서
도덕 정치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묵자는 매우 공리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다. 또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주창했다.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가장 민중적이었던 철학자였다. 그러나 장자는 이 두 사상을 모두 인위라고 배척한다. 유학과
묵가의 철학 자체가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런 인위적 질서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모든 사람이 생래적 모양대로 사는 것이 좋다"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온갖 사회 정치적 이슈들을 둘러싸고 우리가 벌이고 있는 분쟁과
싸움들을 장자가 보았다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이것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이다. 그렇다면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이란 것이 있는가.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이란 것이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않은 것을 일컬어 진리의 지도리(문짝을 연결시키는 쇠고리)라고 한다.
지도리는 그 고리 가운데의 텅 빈 부분을 얻어서 무궁하게 대응한다.
옳다는 것도 하나의 무궁한 것이고, 그르다는 것도 하나의 무궁한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진리의 입장에서 이것과 저것을 초월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전에 내가 꿈에 나비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히 훨훨 나는 나비로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내가 장자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꿈을 깬
뒤에 보니 엄연히 장자였다. 그러니 이제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나비의 꿈에 현재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가?나비와 나는 차이가 있을 터이지만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을 내가 하나의 자연물로 되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 장자 제물론(齊物論)
▶해설; 장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다.
장자는 예수처럼 비유를 통해 가르쳤는데 이 호접몽(나비꿈)비유가 가장
유명하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불가지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저 멀리 푸른 산이 있는데 저쪽에서 보면 이곳도 푸르겠지"라는 말도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옳은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달리 보일 수 있어서 역시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 골자다. 절대적
기준이 없는 것 자체를 받아들여야 진리의 눈을 뜨게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도 장자의 나비꿈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단순히 무조건
상대를 인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아집과 절대주의적 태도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다.
【남쪽 바다에 '숙' 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고 북쪽 바다에 '홀'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으며 중앙 지방에 '혼돈(渾沌)'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다.
숙과 홀은 때때로 서로 더불어 혼돈의 땅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이에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자고 의논하여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자에게만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주자"고 말하고, 하루 한 구멍씩 뚫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일곱째 날이 되던 날 혼돈이 죽어버렸다.】- 장자 응제왕(應帝王)
▶해설; 장자의 무위자연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우화다.
자연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자연 환경을 보호하라는 명제는 아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 수 없는 우주의 생명 현상이 있으니 부디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상 체계이지만 쇼펜하우어도 "곱추에게서 등의 혹을 떼내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자의 말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간 지성의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2. 장자 사상을 통해 제기 될 수 있는 문제들 -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과학 기술의 발달은 현대인에게 편리와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문명 발전 이면에 생기는 그림자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현대는 이미 수많은 환경오염과 첨단 무기의 공포 그리고 인간을 생산과정의 부속물로 여기는 '인간소외
현상'이라는 부작용이 만연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기술 문명의 발전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과학 기술이 만들어낸 기계적인
세계는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더구나 사상의 혼란과 이념의 과잉은 또 어떤가.
이 사상이 옳다 저 사상이 옳다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문명의 발전이나 사상 이념의 대립이 모두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이 마음대로 역사를 재단하고 예측하며
이런 저런 세계를 만들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장자가 볼 때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우리는 합리주의라고
부르지만 이성에 대한 오만이
정치의 영역에서 나타나면 독재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독재의 반대편에 민주주의가 있지만 이 역시 대중이 감정에 사로잡혀 국가와 사회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소위 포퓰리즘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자의 사상은 오늘의 우리가 현실의 대안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눈 앞에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널려있는데 "무위자연!"만을 외치기에는 당면한 과제들이 너무 많다. 다만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범위에서 조작적, 인위적 정치가 아닌 자연적 정치질서와 자연적 사회구조가 갖추어지기를 노력하자. 장자의 사상은 너무 어렵지요?
< 한국경제신문 홍보람>
장자를 중심으로 본 담론 |
도가철학은 도(道)를 근본원리로 하는 중국 고대의 철학 유파,
무위와 자연을 중시하며, 노자와 장자가 그 대표이다.
도가는 유가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이다.
장자(BC365?~BC290?)는 중국 전국시대(중기) 사상가.
제자백가 가운데 도가의 대표자. 맹자와 동시대이거나 조금 늦다.
소요유 - 장자 내편 7편중의 하나
형체가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형체가 없는 것.
지인무기(至人無己) - 지인(至人)은 지극히 높은 경지애 도달한 사람이고
무기(無己)는 사리사욕이 없고 자만심이 없는 것.
장자의 호접몽(蝴蝶夢) - 나비꿈의 우화 -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물화(物化) - 장자 철학의 중요 용어, 자신과 대상이 융합되는 경지(혼연일치).
예술에서는 상상과 감정이입을 통한 혼연일체가 중요하다.
포정해우(捕丁解牛) -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말이다.
기술이 매우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도(道)와 기(技-art-技藝)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공자와 맹자는 예술을 중시 -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승화시킨다고 보았다.
장자는 예술이 도의 경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봄.
무위자연(無爲自然) - 인위와 강제가 없고 본래의 모습에 근거한 것
도척(盜蹠)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大盜賊) 척(蹠)이라는
사람. 도척(盜蹠)이라고도 쓴다.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었다는 설(說)이 있다.
실재인물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공자에게 유하혜(柳下惠)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우의 이름은 도척(盜蹠)이었다.
공자가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를 설득해 보겠네.”고 도척을 만나 설득했는데, 도척은 크게 화를 내면서
“나는 사람의 물건이나 훔치지만, 공구(孔丘) 너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니 도둑
치고도 너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너를 도구(盜丘)라
부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도척(盜蹠)이라 부르는 것이냐!” 라고 말했다 한다.
《장자(莊子)》 잡편 제29편의 <도척>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공자와 도척이 가공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내용
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에게 유하혜(柳下惠)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우의 이름은 도척(盜蹠)이었다. 공자가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를 설득해 보겠네.” 라고 말했다. 유하계가 “자네는 한 사람의 아비라면 반드시 그 자식을 훈계할 수 있고, 한 사람의
형이라면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만약 자식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동생이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나?
부디 가지 말게.” 고 말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안회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자공을 오른편에 앉힌 뒤 도척을 만나러가서 설득을 했다.
공자가 끼친 해가 도척보다 더 크다.
도척(盜蹠)은 크게 화가나서
“내가 듣기에, 옛날에는 새나 짐승이 많고 사람의 수는 적어, 사람들은 모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며 짐승의 해를 피했고, 낮에는 도토리와 밤을 줍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유소씨(有巢氏)의 백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 옛적에는 백성들이 옷을 입을 줄도 모르고 여름이면 장작을
쌓아놓았다 겨울에는 이것을 땠다. 그래서 이들은 지생의 백성이라고 한다.
신농씨(神農氏) 시대에는 안락하게 누워 자고 일어나서는 유유자적했다.
백성들은 자기의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몰랐고, 고라니나 사슴들과 함께
살았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 길쌈을 해서 옷을 입었으며 서로를 해치려는 마음
따위는 지니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덕이 한창 성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황제(黃帝)는 덕을 완전히 실현시킬 수가 없어,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워, 사람들의 피가 백리 사방을 물들였다. 이어 요(堯)와 순(舜)이
천자가 되자 많은 신하들을 내세웠고, 탕왕(湯王-商王朝 즉 殷를 열었다)은 그의 주군(夏나라의 걸·桀王)을 내쳤으며,
무왕(武王)은 주왕((殷나라의 紂王)을 죽였다. 이 뒤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하게 된 것이다.
탕왕과 무왕 이후는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다.
공구(孔丘) 너는 지금 문왕(文王)의 도를 닦고서 천하의 이론을 도맡아 후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나섰다. 넓고 큰 옷에 가는 띠를 띠고 헛된 말과 거짓 행동으로 천하의 임금들을 미혹시켜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다. 도둑치고도 너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너를 도구(盜丘)라 부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도척(盜蹠)이라 부르는 것이냐!
공자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꾀어 따르게 하고, 그가 쓰고 있던 높은 관을 벗기고,
차고 있던 길 칼을 풀어놓게 한 뒤, 네 가르침을 받게 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공구(孔丘)는 난폭한 행동을 금지시키고 그릇된
행동을 금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결국 자로(子路)는 위나라 임금을 죽이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위나라의 동문 밖에서 사형을 받아 그의 몸이 소금에 절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너의 가르침이 불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구(孔丘) 너는 스스로 재사니, 성인이니 자처하지만, 노나라에서 추방되었고, 제나라에서는 궁지에 몰렸었고, 진과 채나라
사이에서는 포위를 당했으니, 천하에 몸둘 곳이 없게 되지 않았느냐? 너는 자로(子路)로 하여금 처형을 당해 몸이 소금에 절여지게
만들었으니, 결국 환란으로 위로는 몸을 보전할 길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너의 도를 어찌 귀한
것이라 하겠느냐
세상에서 덕이 높다고 한다면, 황제보다 더한 이가 없지만, 그 황제도 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어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워 백 리 사방을 피로 물들였다.
요임금은 자애심이 없었고, 순임금은 효를 다하지 못했으며, 우임금은 일을 하느라 말랐고, 탕왕은 그 주군을 내쳤으며, 무왕은 주왕을 죽였고, 문왕은 유리에
유폐되었다. 이 여섯 사람은 세상에서 높이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논하자면, 모두가 이익 때문에 그 진실에 대해 미혹됨으로써 억지로 그 성정을 거슬렀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현인이나 충신도 본성을 위배했던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사로는 백이와 숙제가 있는데, 고죽의 임금자리를 사양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아무도 장사를
치뤄주지 않았다. 포초라는 사람은 자기의 행동을 꾸미고 세상을 비난하다가 나무를 끌어안고 죽었다. 신도적은 임금에게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돌을 지고 스스로 황하에 몸을 던져 물고기와 자라의 밥이 되었다. 개자추는 충성을 다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으나, 뒤에 문공이 그를 배반하자, 그는 노하여 진나라를 떠나 살다 나무를 껴안은 채 타 죽었다. 미생은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나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불어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다리 기둥을 끌어안은 채 죽었다. 이 네 사람은
잡기 위해 매달아 놓은 개나, 제물로 강물에 던져진 돼지나 표주박을 들고 구걸을 하러 다니는 자나 다를 것이 없다. 모두가
자기의 명분에 얽매이어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근본으로 돌아가 수명을 보양하려 하지 않은 자들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충신으로는 비간이나 오자서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오자서는 처형을 당해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비간은 가슴을
찢겨 심장이 드러내졌다. 이 두 사람은 천하에서 말하는 충신들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위에서부터
자서나 비간까지 모두 귀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내게 귀신 얘기를 한다면 모르지만,
사람에 관한 일을 가지고 얘기한다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도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너에게 사람의 성정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
눈은 좋은 빛깔을 보려 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며, 입은 좋은 맛을 보려 하고, 기분은 만족을 바란다.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살, 중간 정도로는 80살, 밑으로 가면 60살이다. 그것도 병들고 여위고 죽고 문상하고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빼고 나면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에 불과 사오일 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일정한 때가 있다.
이 유한 한 육체를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좁은 문틈을
달려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수명을 보양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가 도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네가 하는 말들은 모두 내가 버리는 것들이다. 당장 뛰어 돌아가거라.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너의 도라는 것은 본성을 잃은 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사기와 허위일 뿐이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전할 수
없느니라. 어찌 논의할 대상이나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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