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from 역사스크랩/동양사 2010. 8. 1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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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의 세계] ① 莊子


사람은 소나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의 골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가마귀는 쥐를 맛있게 먹는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존재가 '올바른' 맛을 아는가?

장자의 『장자(莊子)』는 방대한 분량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통독을 하지 않고 한 토막의 짧은 구절만 읽어도
그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유려함은 깊은 감동을 주기에 많은 이들이
저자인 장자를 '동양사상의 둘도 없을 귀재(鬼才)'라고 손꼽는다.

『장자』는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나뉘는데,
내편(內篇)은 장자 본인이 집필하고
외편(外篇)은 장자의 제자 혹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쓴 글을 모았다는 분석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하다.

내편이 보다 응축되고 밀도 있는 철학적 성찰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며, 기언(奇言)과 독설(毒舌)을 통한 장자의 천재적 표현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 내편』에 집중하여 그 사상적 특색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광범위한 사색의 폭을 감안한다면 짧은 서평으로 장자 사상의 요체를 모두
보여주기란 곤란하겠지만, 장자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자 서구 중심의 근대화를 경험하고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로 고민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
상대주의적 ·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집중하여 장자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원문 읽기.

道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귀천(貴賤)이 없다. 하지만
개별적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는 귀하고 남은 천하다.
사회 관습의 관점에서 보면, 천(賤)은 개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별의 관점에서 보아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한다면
만물 중에 크지 않은 것이 없다.

천지가 곡식 낟알만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 터럭의 끝이 언덕(丘)이나 산(山)만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물들의 차이를 상대적으로 본 결과이다.(중략)

道의 관점에서 만물을 똑같이 본다면 무엇이 짧고 무엇이 긴가?
道에는 처음도 끝도 없다.
개별적 존재에만 삶과 죽음이 있다.
개별적 존재는 완성된 하나의 결과에만 머무를 수 없다.
한번 비었다가는 다시 차게 되니 자기 모습을 고정할 수 없다.
흘러간 세월은 다시 올 수 없고 시간은 정지할 수 없다.
소멸과 생성, 채움과 비움은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


▶ 해설


장자는 '제물론'의 관점에서 세상 만물을 동등하게 바라본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 함께 존재하는 만사만물은 서로 같다는 것이다.
'차이'와 '차별'을 부정하는 이러한 관점을 견지할 때 세속적인
가치와 권위는 모두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만물을 갈라서 나누는 사회의 규범과 위계질서(位階秩序)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구속에 불과하다.

장자는 인위적인 가치에 급급해하며 속박당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고 자유로워질 것을 주장한다.

세상의 어리석음과 잘못된 위계를 멀리서 관조하며
일체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소요유(逍遙遊)'는
장자가 추구하던 진정한 삶의 자세이다.




 

원문 읽기.

각자가 자기의 편견(偏見)에 따라서 그것을
시비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표준이 없겠는가?


도는 작은 성취에서 어그러지고, 말은 화려한 꾸밈에서 어그러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 논쟁은
상대방이 '그르다'라고 하는 것을 이쪽에서는 '옳다'고 하며,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이쪽에서는 '그르다'라고 한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이쪽에서 그르다 한다면
그것은 밝은 지혜로써 하는 것만 못하다.



▶ 해설


항상 변화하는 세상만물을 고정된 잣대로 재단하고 인위적인 평가
로써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리석다고 비판하는 장자에게는
미와 추, 선과 악, 삶과 죽음의 구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장자는 세상의 구분과 대립을 지양하고 사람들이 만물과 어울려
조화롭게 살기를 바랐다.

장자가 살았던 춘추전국 시대의 아귀다툼과
제자백가 쟁론의 논박은 장자의 눈에는 피곤한 일로 비쳐졌다.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진정성'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긍정하고
남의 가치 또한 그대로 긍정하는 데에 있지, 격렬한 다툼과
대립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장자는 '상대주의'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원문 읽기.

산의 나무는 그 유용(有用)함 때문에 베이는 것이고,
기름덩이는 그 쓰임새(有用) 때문에 불태워진다.


계수 나뭇가지는 약용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진다.
옻나무는 칠에 쓰이기 때문에 잘린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의 쓰임은 알지만 '무용'의 쓰임은 모른다.



▶ 해설


그리고 장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무소용(無所用)의 논리를 주장한다.

세상의 혈투에 희생되는 똑똑한 사람들과 인간의 편리를 위해 사라지는 유익한 생명체들은 그 '유용함'이 원인이므로 차라리 아무 데에도 쓰일 데가 없는 '무소용'이 생명을 지키는 현명한 길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여러 우화를 통해서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튼튼하고 털이 흰 소가 그 눈에 띄는 유용함 때문에 제물로 바쳐져 생명을 잃게 된다는 이야기가 무척 유명하다.


그런데 장자의 '무소용'은 단순히 생명의 온전함을 위한 방편만이
아니다. 인간의 편협한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일갈이기도 하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봤을 때의 무소용이지 각 생명체들은 그들 나름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장자는 인간의 도구주의를 비판하며 모든 존재는 존재 나름의
고유성과 진실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나'의 기준으로 '남'을 재단하고 규제하려 하는 것은 비극이다.

이러한 논지는 다음의 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문 읽기.

사람은 습(濕)한 데서 자면 병에 걸려 죽는다.
그런데 미꾸라지 또한 이러한가?
사람은 나무 위에 올라가면 떨어질까 무서워서 벌벌 떤다.
원숭이도 또한 이러한가?
이 셋 중에서 어떤 존재가 '옳은' 주거처를 알고 있는가?


사람은 소나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의 골을 달게 먹고,
솔개와 갈가마귀는 쥐를 맛있게 먹는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존재가 '올바른' 맛을 아는가?


모장(毛嬙)이나 여희와 같은 미인을 사람들이 보면 좋아하지만,
물고기가 보면 물 속 깊이 숨고 새가 보면 높이 달아나고
사슴이 보고는 마구 도망친다.
이 넷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미를 알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인의라는 도덕관념이나 시비 판단의 방도도
마구 뒤섞여 있으니 내가 어찌 그것들을 변별할 수 있겠는가?



▶ 해설


모든 존재는 다양하고 개별적이며,
그 고유성을 넘어서는 획일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인간은 제한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의 잣대로 만물을 평가하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장자는
인간의 도구주의적 관점과 그로 인한 한계를 넘어설 것을 요청한다.


서양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를 밟은 현대 우리 사회에는 '지식이
곧 힘'(Knowledge is power) 이라는 신념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의 도구적 역량(지식)에 의한 자연 지배는
장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인위적인 잣대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차등적으로 구분하고,
위계질서에 따라 인간에게도 차등적 관념을 적용하는 것은
막스 베버가 말한 철창(iron cage)에 갇히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이기(利器)의 속박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장자는 그의 해답을 제시한다.


세상만물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니 문명제도의 발달로 개인의
자유를 간섭받지 말라 하고, 타자(他者)와의 투쟁과 대립을 지양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고유하고 독자적이라는 장자에 따르면 '나'의 의미의 원천을 내 외부에서는 찾을 수 없다. 장자는 생명력 있는 '개인 자신'의 삶과 세상의 조화로운 '평화'를 원했다.



< 한국경제신문  홍보람>

[동양고전의 세계] ② 莊子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
'無爲自然'





1. 노장 사상


노장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무위(無爲)는 '억지로 하지 않고 인공의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행위'를 뜻한다. 이 때 행위라 함은 정치나 윤리 등을 말한다. 유교나
법가들처럼 인위적으로 무언가의 질서를 만들려 하지 말고 자연적 질서
혹은 자연상태를 존중하라는 뜻이다.


유학은 인간의 도덕적 교화를, 법가는 인간 행동의 질서 있는 규제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질서를 어기는 것일 뿐 원초적 자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치세와 처세의 방책이라는 논리다.
법 질서니 도덕 윤리 같은 주장이 인간 사회에 혼란만 조성하고 역으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억압한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자유주의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의 과도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등은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부질없는 짓 (인위: 무위에 반하는)이라는 말이 된다. 무정부주의 혹은 세계동포주의적 사고의 배경을 이루기도 한다.


2. 장자와 노자의 차이점


노자는 세상에는 크고 · 작음과 높고 · 낮음의 차이가 있고,
아름다움과 추함 · 선과 악의 대립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장자는
그러한 구별과 대립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다. 장자는 세상에는 시비도리(是非道理)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노자가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는 데 반해 장자는 신비주의적이다. 말하자면 노자는
현실 정치를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장자는 개인을 중심에 놓고 있다.

장자의 사상은 후세인들의 신선사상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장자>에서 발췌한 다음의 원문들을 읽어보면서 장자의 사상을 음미하자.


3.원문 읽기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원숭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씩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다시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라 고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하루 동안에 받는 양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기뻐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니 이는 인간들이 시비(是非)를 따지는 마음과 같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시비를 화합시키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楚)나라를 여행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항아리로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효과는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까지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노인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은 대답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데, 뒤쪽은 무겁게 하고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콸콸 넘치도록 빠릅니다.
그 기계를 두레박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 따위를 갖게 되면 그 기계로 말미암은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라오. 그런 마음이 있게 되면 곧 순진결백(純眞潔白)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道)가 깃들이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쓰지 않는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않을 뿐이오."





장자 외편인 천지(天地)편


*장자는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편, 잡편(雜篇) 11편으로
모두 33편이며, 그 중에 내편이 가장 오래되었다. 외편과 잡편은
후학(後學)들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미와 비둘기가 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이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조차 불가능해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한데 붕은 무엇 때문에 구만 리나 날아서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가까운 교외의 들판에 나가는 사람은 세끼만 준비해도 온종일 배부를 수 있지만, 백리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부터 방아를 찧어 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전부터 식량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 미물이야 큰일에 대처하는 요령을 어찌 알겠는가.】


장자 소요유(逍遙遊)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제가 듣기에 '성인은 속된 일을 하지 않고, 이익을 좇지 않고, 해 입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선택됨을 기뻐하지 않고, 도에 억지로 맞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말을 아끼고 세속을 초월하여 즐긴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터무니없다 하시지만, 제 좁은 생각으로는 이야말로
도를 훌륭하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해 주시지요."
장오자가 대답했다.
"이는 황제조차 당황해 할 말인데 공자인들 알겠는가. 그대는 너무 성급
하다. 달걀에서 새벽을 깨우는 닭 울음을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 두서없이 말하겠으니 들어주기 바란다. 성인은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보듬으며, 만물과 하나가 되어 혼돈에 머무르며, 귀천을 차별하지 않는다.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고, 성인은 만물과 더불어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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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莊子)

장자(莊子 BC. 369 ~ BC, 286) 고대 중국 사상가, 노자(老子)를 잇는 도가(道家)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세 사람들은 장자와 노자의 도가사상을 합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 일컫는다. 장자의 사상은 장자(莊子)라는 책속에 집중되어 있다.


[동양고전의 세계] ③ 莊子


장자 제물론 (齊物論)


1.원문 읽기


【참다운 진리는 어디에 숨었기에 진짜다 가짜다 하는 논의가 생겨났으며, 참으로 옳은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옳다 그르다 하는 논의가 생겨났는가? 참다운 진리는 어디에 갔기에 있지 않으며, 참으로 옳은 말은 어디에 있기에 현재의 말들이 타당하지 않은가? 참다운 진리는 조금 이루어진 것에 의해서 숨겨졌고, 참으로 옳은 말은 번지르르한 미사여구에 의해 숨겨졌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상대가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여 비난하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밝은 진리의 입장에서 상대와 자기를 동시에 초월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 해설; 장자가 비교적 직설적 어법으로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고 있다.
유가(儒家)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도덕철학을 말한다.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군자들이 민중을 교화 훈육시키면서 도덕 정치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묵자는 매우 공리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다. 또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주창했다.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가장 민중적이었던 철학자였다. 그러나 장자는 이 두 사상을 모두 인위라고 배척한다. 유학과 묵가의 철학 자체가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런 인위적 질서를 세우려는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괴로워질 뿐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모든 사람이 생래적 모양대로 사는 것이 좋다"
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온갖 사회 정치적 이슈들을 둘러싸고 우리가 벌이고 있는 분쟁과
싸움들을 장자가 보았다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이것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 저것 또한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이다. 그렇다면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이란 것이 있는가.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이란 것이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않은 것을 일컬어 진리의 지도리(문짝을 연결시키는 쇠고리)라고 한다.
지도리는 그 고리 가운데의 텅 빈 부분을 얻어서 무궁하게 대응한다.
옳다는 것도 하나의 무궁한 것이고, 그르다는 것도 하나의 무궁한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진리의 입장에서 이것과 저것을 초월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고 했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전에 내가 꿈에 나비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히 훨훨 나는 나비로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내가 장자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꿈을 깬 뒤에 보니 엄연히 장자였다. 그러니 이제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나비의 꿈에 현재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인가?나비와 나는 차이가 있을 터이지만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을 내가 하나의 자연물로 되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 장자 제물론(齊物論)


▶해설; 장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다.
장자는 예수처럼 비유를 통해 가르쳤는데 이 호접몽(나비꿈)비유가 가장
유명하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불가지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저 멀리 푸른 산이 있는데 저쪽에서 보면 이곳도 푸르겠지"라는 말도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보면 옳은 것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달리 보일 수 있어서 역시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것이 골자다. 절대적 기준이 없는 것 자체를 받아들여야 진리의 눈을 뜨게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도 장자의 나비꿈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단순히 무조건
상대를 인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아집과 절대주의적 태도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다.


【남쪽 바다에 '숙' 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고 북쪽 바다에 '홀'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으며 중앙 지방에 '혼돈(渾沌)'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다.
숙과 홀은 때때로 서로 더불어 혼돈의 땅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이에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에 보답하자고 의논하여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자에게만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주자"고 말하고, 하루 한 구멍씩 뚫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일곱째 날이 되던 날 혼돈이 죽어버렸다.】
- 장자 응제왕(應帝王)


▶해설; 장자의 무위자연을 설명하는 가장 완벽한 우화다.
자연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자연 환경을 보호하라는 명제는 아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는 알 수 없는 우주의 생명 현상이 있으니 부디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사상 체계이지만 쇼펜하우어도 "곱추에게서 등의 혹을 떼내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자의 말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간 지성의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2. 장자 사상을 통해 제기 될 수 있는 문제들 -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과학 기술의 발달은 현대인에게 편리와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문명 발전 이면에 생기는 그림자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현대는 이미 수많은 환경오염과 첨단 무기의 공포 그리고 인간을 생산과정의 부속물로 여기는 '인간소외 현상'이라는 부작용이 만연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기술 문명의 발전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과학 기술이 만들어낸 기계적인 세계는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더구나 사상의 혼란과 이념의 과잉은 또 어떤가.
이 사상이 옳다 저 사상이 옳다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문명의 발전이나 사상 이념의 대립이 모두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이 마음대로 역사를 재단하고 예측하며 이런 저런 세계를 만들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장자가 볼 때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우리는 합리주의라고 부르지만 이성에 대한 오만이
정치의 영역에서 나타나면 독재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독재의 반대편에 민주주의가 있지만 이 역시 대중이 감정에 사로잡혀 국가와 사회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소위 포퓰리즘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자의 사상은 오늘의 우리가 현실의 대안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멀리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눈 앞에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널려있는데 "무위자연!"만을 외치기에는 당면한 과제들이 너무 많다. 다만 장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범위에서 조작적, 인위적 정치가 아닌 자연적 정치질서와 자연적 사회구조가 갖추어지기를 노력하자. 장자의 사상은 너무 어렵지요?
< 한국경제신문  홍보람>








장자를 중심으로 본 담론
도가철학은 도(道)를 근본원리로 하는 중국 고대의 철학 유파,
무위와 자연을 중시하며, 노자와 장자가 그 대표이다.
도가는 유가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이다.
장자(BC365?~BC290?)는 중국 전국시대(중기) 사상가.
제자백가 가운데 도가의 대표자. 맹자와 동시대이거나 조금 늦다.
소요유 - 장자 내편 7편중의 하나
형체가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형체가 없는 것.
지인무기(至人無己) - 지인(至人)은 지극히 높은 경지애 도달한 사람이고
무기(無己)는 사리사욕이 없고 자만심이 없는 것.
장자의 호접몽(蝴蝶夢) - 나비꿈의 우화 -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물화(物化) - 장자 철학의 중요 용어, 자신과 대상이 융합되는 경지(혼연일치).
예술에서는 상상과 감정이입을 통한 혼연일체가 중요하다.
포정해우(捕丁解牛) - 포정이 소를 잡는다는 말이다.
기술이 매우 뛰어난 것을 가리킨다.
도(道)와 기(技-art-技藝)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공자와 맹자는 예술을 중시 -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승화시킨다고 보았다.
장자는 예술이 도의 경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봄.
무위자연(無爲自然) - 인위와 강제가 없고 본래의 모습에 근거한 것

도척(盜蹠)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大盜賊) 척(蹠)이라는
사람. 도척(盜蹠)이라고도 쓴다.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었다는 설(說)이 있다.
실재인물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공자에게 유하혜(柳下惠)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우의 이름은 도척(盜蹠)이었다. 공자가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를 설득해 보겠네.”고 도척을 만나 설득했는데, 도척은 크게 화를 내면서
“나는 사람의 물건이나 훔치지만, 공구(孔丘) 너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니 도둑
치고도 너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너를 도구(盜丘)라
부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도척(盜蹠)이라 부르는 것이냐!”
라고 말했다 한다.



《장자(莊子)》 잡편 제29편의 <도척>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공자와 도척이 가공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내용
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에게 유하혜(柳下惠)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아우의 이름은 도척(盜蹠)이었다. 공자가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를 설득해 보겠네.” 라고 말했다. 유하계가 “자네는 한 사람의 아비라면 반드시 그 자식을 훈계할 수 있고, 한 사람의 형이라면 그 아우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만약 자식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지 않고 동생이 형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나?
부디 가지 말게.” 고 말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안회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자공을 오른편에 앉힌 뒤 도척을 만나러가서 설득을 했다.

공자가 끼친 해가 도척보다 더 크다.

도척(盜蹠)은 크게 화가나서
“내가 듣기에, 옛날에는 새나 짐승이 많고 사람의 수는 적어, 사람들은 모두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며 짐승의 해를 피했고, 낮에는 도토리와 밤을 줍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유소씨(有巢氏)의 백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또 옛적에는 백성들이 옷을 입을 줄도 모르고 여름이면 장작을
쌓아놓았다 겨울에는 이것을 땠다. 그래서 이들은 지생의 백성이라고 한다.

신농씨(神農氏) 시대에는 안락하게 누워 자고 일어나서는 유유자적했다.
백성들은 자기의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몰랐고, 고라니나 사슴들과 함께
살았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 길쌈을 해서 옷을 입었으며 서로를 해치려는 마음
따위는 지니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극한 덕이 한창 성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황제(黃帝)는 덕을 완전히 실현시킬 수가 없어,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워, 사람들의 피가 백리 사방을 물들였다. 이어 요(堯)와 순(舜)이
천자가 되자 많은 신하들을 내세웠고, 탕왕(湯王-商王朝 즉 殷를 열었다)은 그의 주군(夏나라의 걸·桀王)을 내쳤으며, 무왕(武王)은 주왕((殷나라의 紂王)을 죽였다. 이 뒤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하게 된 것이다.
탕왕과 무왕 이후는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다.

공구(孔丘) 너는 지금 문왕(文王)의 도를 닦고서 천하의 이론을 도맡아 후세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나섰다. 넓고 큰 옷에 가는 띠를 띠고 헛된 말과 거짓 행동으로 천하의 임금들을 미혹시켜 부귀를 얻으려는 것이다. 도둑치고도 너보다 더 큰 도둑은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어째서 너를 도구(盜丘)라 부르지 않고, 반대로 나를 도척(盜蹠)이라 부르는 것이냐!

공자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너는 달콤한 말로 자로를 꾀어 따르게 하고, 그가 쓰고 있던 높은 관을 벗기고,
차고 있던 길 칼을 풀어놓게 한 뒤, 네 가르침을 받게 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공구(孔丘)는 난폭한 행동을 금지시키고 그릇된 행동을 금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결국 자로(子路)는 위나라 임금을 죽이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위나라의 동문 밖에서 사형을 받아 그의 몸이 소금에 절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너의 가르침이 불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구(孔丘) 너는 스스로 재사니, 성인이니 자처하지만, 노나라에서 추방되었고, 제나라에서는 궁지에 몰렸었고, 진과 채나라 사이에서는 포위를 당했으니, 천하에 몸둘 곳이 없게 되지 않았느냐? 너는 자로(子路)로 하여금 처형을 당해 몸이 소금에 절여지게 만들었으니, 결국 환란으로 위로는 몸을 보전할 길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너의 도를 어찌 귀한 것이라 하겠느냐

세상에서 덕이 높다고 한다면, 황제보다 더한 이가 없지만, 그 황제도 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어 탁록(涿鹿)의 들에서 싸워 백 리 사방을 피로 물들였다.
요임금은 자애심이 없었고, 순임금은 효를 다하지 못했으며, 우임금은 일을 하느라 말랐고, 탕왕은 그 주군을 내쳤으며, 무왕은 주왕을 죽였고, 문왕은 유리에
유폐되었다. 이 여섯 사람은 세상에서 높이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논하자면, 모두가 이익 때문에 그 진실에 대해 미혹됨으로써 억지로 그 성정을 거슬렀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현인이나 충신도 본성을 위배했던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사로는 백이와 숙제가 있는데, 고죽의 임금자리를 사양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아무도 장사를 치뤄주지 않았다. 포초라는 사람은 자기의 행동을 꾸미고 세상을 비난하다가 나무를 끌어안고 죽었다. 신도적은 임금에게 간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돌을 지고 스스로 황하에 몸을 던져 물고기와 자라의 밥이 되었다. 개자추는 충성을 다해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에게 먹였으나, 뒤에 문공이 그를 배반하자, 그는 노하여 진나라를 떠나 살다 나무를 껴안은 채 타 죽었다. 미생은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으나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불어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다리 기둥을 끌어안은 채 죽었다. 이 네 사람은 잡기 위해 매달아 놓은 개나, 제물로 강물에 던져진 돼지나 표주박을 들고 구걸을 하러 다니는 자나 다를 것이 없다. 모두가 자기의 명분에 얽매이어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근본으로 돌아가 수명을 보양하려 하지 않은 자들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충신으로는 비간이나 오자서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오자서는 처형을 당해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비간은 가슴을 찢겨 심장이 드러내졌다. 이 두 사람은 천하에서 말하는 충신들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위에서부터 자서나 비간까지 모두 귀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내게 귀신 얘기를 한다면 모르지만, 사람에 관한 일을 가지고 얘기한다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도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너에게 사람의 성정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
눈은 좋은 빛깔을 보려 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며, 입은 좋은 맛을 보려 하고, 기분은 만족을 바란다. 사람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살, 중간 정도로는 80살, 밑으로 가면 60살이다. 그것도 병들고 여위고 죽고 문상하고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빼고 나면 입을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것은 한달 중에 불과 사오일 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일정한 때가 있다.
이 유한 한 육체를 무궁한 천지 사이에 맡기고 있기란 준마가 좁은 문틈을
달려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기의 기분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수명을 보양하지 못하는 자는 모두가 도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네가 하는 말들은 모두 내가 버리는 것들이다. 당장 뛰어 돌아가거라.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너의 도라는 것은 본성을 잃은 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사기와 허위일 뿐이다. 그런 것으로는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전할 수
없느니라. 어찌 논의할 대상이나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메 타포(metaphor-隱喩)와 상징의 연금술사, 莊子 : 저 멀리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이 곤이야.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아무도 몰라.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 해.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어. 이 붕새가 온 힘을 다해 한번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이 새는 바다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데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이야.


제해라는 친구는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갈 때 날갯짓으로 물이 삼천리나 튀어 오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날아 올라가 한번 떠나면 여섯 달 만에야 쉰다고 하더군. (…) 물이 두터이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지.

예를 들어 마룻바닥 패인 곳에 한 잔의 물을 쏟아 놓으면 겨자씨 정도는 띄울 수 있지만 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어버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지. 그처럼 바람이 두터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실을 힘이 없어.
그 때문에 붕새는 구만리를 날아올라 가는 거야.


그래야 바람이 아래에 쌓이게 돼. 그런 뒤
비로소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지고 아무 것도 막는 것이 없어지면 드디어 남쪽으로 향하는 거야. 그런데 매미나 새끼 새는 붕새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다다르려 하지만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뿐이야.


그런데 저 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구만리를 날아올라 남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가까운 곳에 바람 쏘이러 가는 사람은 세끼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지만 백 리길을 갈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찧고 천리 길을 갈 사람은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으는 법이야. 저 두 버러지야 그걸 알 턱이
없지.
작은 앎은 큰 앎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삶은 긴 삶에 미치지 못하지.

(…) 옛날 탕임금이 현자였던 극에게 물었던 것도 이거야.
불모지 북쪽에 검은 바다가 있는데 바로 하늘의 못이야.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너비가 수 천리이고 그 기럭지를 아는 이가 없어.
이름은 곤이야.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은 붕이야. 등허리는 마치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회오리바람을 타고 양뿔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구만 리를 날아올라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뒤에야
남쪽으로 몸을 돌려 비로소 남쪽 바다로 날아가지.


메추라기는 그걸 보고 웃으면서 말하지. 저놈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군. 나는 폴짝 뛰어올라야 몇 길 지나지 않고 내려와서 쑥대밭 사이에서 날갯짓할 뿐이지만 이것도 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 그런데 저놈은 대관절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군.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지.


지식이 벼슬살이를 맡아 다스릴 정도로 풍부한 사람, 행동이 고을에서 이름날 정도로 훌륭한 사람, 덕망이 한나라의 임금에 맞먹을 정도로 훌륭하여 나라에 불려 가는 사람들도 스스로 이 메추라기처럼 자기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송영자는 그런 것들을 우습게 여겨. (…) 이는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지만 여전히 세우지 못한 게 있어. 열자는 바람을 몰고 움직이는데 가뿐하게 날아다니다가 열흘하고 다섯 날이 지난 뒤에야 돌아와. 그 사람 부자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 하지만 그도 걸어 다니는 수준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바람에 기대지.


이를테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정기를 타고 여섯 가지 기운의 변화를 몰아서 끝없는 세상에 노니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아. 그러기 때문에
지극한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고, 신묘한 사람은 공을 자랑하는 일이 없고, 성인은 이름을 내거는 일이 없다고 하는 거야.

 

장자 [莊子, BC 369 ~ BC 289(?)]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이는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며(無爲),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自然)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 거협은 작은 상자를 연다, 즉 상자를 열어 상자 안의 물건을 훔친다는 뜻이다.

유가적인 인의(仁義), 성지(聖知) 등은
위정자의 본질인 대도(大盜)를 덮고 감추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그것들을 버리고 옛날의 소박한 이상사회 至德之世로 돌아가자고 호소한 문헌이다.


작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뜯는 도둑을 염려하여 지키고 방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끈이나 줄을 당겨 단단히 묶고 빗장과 자물쇠를 튼튼히 채운다. 이것이 세속에서 이른바 <도둑을 방비하는> 지혜이다.


그러나 큰 도둑이 오면, 궤짝을 통째로 등에 지고 상자를 손에 들고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달아나면서 오직 끈이나 줄, 빗장이나 자물쇠가 견고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앞서 이 른바 지혜라는 것은 큰 도둑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시험 삼아 따져보려고 한다. 세속에서 이른바 지혜라는 것이 큰 도둑을 위해 도와준 것이 아니겠으며 이른바 성(聖)이란 것이 큰 도둑을 위해 지켜준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옛날 제나라는 이웃 고을이 서로 바라보이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려서 그물이 펼쳐지는 곳과 쟁기와 보습이 찌르는 곳이 사방 2 천 리에 달했는데 사방 국경 안을 통틀어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邑, 屋, 州, 閭, 鄕, 曲 등의 고을을 구석구석까지 다스림에 어찌 성인을 본받지 않았겠는가마는 田成子가 하루아침에 제나라 임금을
죽이고 그 나라를 훔쳤으니 훔친 것이 어찌 나라뿐이었겠는가.


성지의 규범도 함께 훔쳤다. 그 때문에 전성자는 도적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몸은 요순과 같이 편안한 지위에 머물러 작은 나라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고 큰 나라가 감히 주벌하지 못해서 열두 세대 동안이나 제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이는 제나라를 훔쳤을 뿐만 아니라 성지의 규범까지 아울러 훔쳐서
도적의 몸을 지킨 것이 아니겠는가.


 

1. 소요유편: 거니는 즐거움
2. 제물론편: 가지러한 만물의 이야기
3. 양생주편: 삶을 기르는 방법
4. 인간세편: 사람들 사이에 서다
5. 덕충부편: 덕이 충만한 사람들
6. 대종사편: 으뜸가는 스승
7. 응제왕편: 제왕이 되어야 할 자
8. 남은 이야기

* 이 강좌는『장자』원문에 대한 독해와 해설이 곁들여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장자1』(안병주, 전호근, 전통문화연구회 엮음.)를 참고하시면 수업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전호근 <장자, 그 신랄한 패러디의 세계>는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의 상징과 비유로 인해 아름답지만 모호한 표현이 넘쳐나는『장자』를 간명한 해설과 함께 읽어감으로써 함께 하는 이들로 하여금 장자와 함께 절대자유의 세계를 여행하는 새로운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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