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엔닌 스님, 그것을 알려주마
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1.03.26 08:23
장보고가 세운 산동의 적산법화원 신라인들의 생활과 불교의례, 음악을 소소히 기록한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 唐求法巡禮行記)는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고본(古本)에 의하면, 엔닌은 836년 5월14일 당나라로 따나기에 앞서 구다라스의 나니와쓰 나루터를 떠나 가와라신궁사(香春神宮寺)로 향했다. 이곳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께 순례여행의 무사함을 빌고 7월2일 당나라로 출항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엔닌 여행기의 권위자인 미국의 라이샤워 박사에 의하면, 엔닌은 장보고를 몹시 존경하여 대사라고 존칭했다. "보잘 것 없는 이 사람에게 너무나 큰 행운을 안겨주셨고 대사님의 서원에 의해 축복된 터전에 체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장보고의 은혜에 감사했다.
엔닌은 근 10년간의 당나라 순례를 마치고 귀국할 때 다시금 신라 선원들의 도움으로 847년 9월2일 중국 연안을 떠나 15일간의 항해 끝에 출발지였던 신궁사로 입국했다. 귀국한 직후인 847년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 사찰 북쪽 언덕에 '신라명신'을 모시기 위한 '적산궁'(赤山宮)을 건립했다. 이후 일본의 전국 사찰에서는 천태종을 전승하는 대사(大師)로 엔닌스님을 우러르게 됐고 천태종의 불법수호신으로 신라명신을 모시게 됐다.
엔닌스님이 이토록 받들었던 신라명신은 대체 어떤 신일까? 이는 다름아닌 엔닌의 스승인 사이초를 수호한 신이기도 하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사이초(767~822)는 신라인으로 일본 천태종의 개조이며 엔랴쿠지 가람을 창설한 사람이다. 그는 803년 4월16일 간무왕(781∼806)의 칙허를 받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게 됐는데, 그가 당나라로 떠나기 전 먼저 찾은 곳도 규슈의 신라신 터전인 '가와라다케'(香春岳)였다고 한다.
사이초스님은 이곳에서 1년3개월 동안 '신라명신'에게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다 804년 7월6일 신라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갔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그 무렵 일본의 학문승이나 사절은 항해의 선진국이었던 신라 배에 의존해 당나라를 오갔다는 것이 큐슈대 불교사학자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교수의 설명이다.
사이초는 당나라 유학을 마친 후 9년째인 814년 다시금 신라신의 터전 가와라다케로 찾아가 '가와라신궁사'를 창건하고 신라명신을 모셨다. 고대 일본에서 신령과 부처를 함께 합사하는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왕실제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신궁사' 즉 신(神)과 불(佛)은 일심동체라는 종교관에서였다. 이러한 연유로 엔닌도 당나라로 가면서 스승이 세운 '가와라신궁사'에 참배했고, 이후 줄곧 스승이 모시던 신라명신을 숭모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엔닌 일기에도 "신라신인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의 신단을 모시고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엔닌은 시모스께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의 신라인 호족 니부(壬生)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이 가문은 신라 계열로 초대왕 숭신천황(스진·3C 전후의 나라 지방 지배자)과 핏줄이 이어진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숭신천황의 왕자와 연결되는 지방의 명문가였다"고 한다. 그는 9세 때 고향 쓰가땅의 다이지지(大慈寺)에 들어가 중국인 광지(廣智)스님의 가르침을 받다가 15세에 사이초(最澄767∼822)의 제자가 됐다. 사이초에게서 주로 지관(止觀)의 법문(法文)을 배우며 20년 동안을 수학했다니 그에게 신라인 스승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할 수 있다.
35세 때 잠시 산에서 내려와 포교활동도 했으나 곧 히에이산으로 돌아와 참선수행에 전념했다고 '자각대사전'(9세기)에 적혀 있다. 엔닌 스님의 수행을 기록한 '예악요기'(叡岳要記·10세기)에 따르면 그는 히에이산 깊은 산속인 요가와(橫川)에서 죽음에 처할 만큼 큰 고통을 견뎌내며 3년 동안 참선수행을 행했다고 한다. 이후 호오류사(法隆寺)를 비롯한 몇몇 사찰에서 강술활동을 하다가 45세에 청익승으로 선발되어 당나라로 구법여행을 했다.
엔닌의 출생과 수행과정을 볼 때, 장보고를 비롯해 신라인들이 그의 구법 여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은 그럴만한 인연의 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간 엔닌스님은 오대산이며 천태산과 장안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대를 다니며 경전을 필사하며 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 559권에 달하는 불교문헌과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여러 불구(佛具)를 가져와 일본 불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천태종 산문파(山門派)의 개조가 됐다.
일본 황실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귀국 이듬해인 848년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의 직함을 내렸으며 61세 때인 854년 제3대 천태좌주로 보임되어 입적 때까지 10년간 머물렀다. 입적 2년 후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그가 중국에서 도입한 송경(誦經) 방식이 지금도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으니 일본의 범패인 쇼묘(聲明)는 엔닌을 빼고는 얘기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일본의 쇼묘는 또한 신라인 소리와도 관련이 있으니 엔닌스님은 이를 두고 신라풍과 일본풍이 비슷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사진 > 엔랴쿠지 사찰 근본중당 앞 언덕의 신라 해상왕 '장보고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