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내 권력체계가 김일성 유일지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수령’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데 중대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갑산계 숙청사건’이다.
1967년 5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이효순 등의 갑산계가 숙청당했고, 이와 함께 당의 조직, 사상, 문화 분야 담당자들인 김도만, 허석선, 고혁, 하앙천 등도 제거되었다. 이들의 숙청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숙청에서부터 연안계와 소련계의 제거 과정에서도 승승장구해왔던 김일성의 항일무장 세력의 한 부분이었던 ‘갑산계(또는 조국광복회계)’였기 때문이다.
박금철, 허석선, 김왈룡, 이효순 등은 항일무장투쟁 시절 김일성이 국내와 연계를 갖고 조국광복회를 추진하던 1936년 무렵,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6사(일명 ‘조선인민혁명군’)와 연결해 국내에 건설한 반일 지하조직 ‘한인민족해방동맹’ 출신들이었다. 이 가운데 이효순은 일제시기 함북 길주에서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과 직접 연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조국광복회 지하조직원이었던 이제순의 친형이었다. 당시 조국광복회의 국내 조직의 주역이었던 이제순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진공작전 뒤 ‘갑산,혜산사건(일명 갑산공작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돼 1945년 3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갑산계의 죄명은 “당원들에게 부르조아사상, 수정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 교조주의, 사대주의, 종파주의, 지방주의, 가족주의와 같은 온갖 반혁명적 사상을 퍼뜨려 당과 인민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시키려고 책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은 어떤 행동을 했기에 이런 죄목들을 쓴 것일까?
당시 숙청 인사들 가운데 대표격이었던 박금철은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이면서 비서국 비서로 상당한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그는 봉건주의와 가족주의 사상 유포라는 혐의를 쓰게 되었다. 박금철은 당 간부들에게 봉건서적인 「목민심서」를 필독문헌으로 읽게 했고, 검덕광산을 현지 지도하면서 수상이 직접 내린 지시를 무시하고 노동자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지시해 광석을 계획의 절반밖에 생산하지 못하게 했다고 비판받았다. 또 당 역사연구소로 하여금 자신이 항일활동하던 함경남도 갑산에 생가를 꾸리게 했으며, 「일편단심」이란 연극 역시 박금철 부인의 수절을 형상화했다고 비판되었다.
이 밖에도 김일성의 연설에서 ‘천리마’란 말과 ‘일당백’이라는 말을 빼버렸다든지 자기 딸을 경락연구소에 배치하고 김봉환 박사 등 경락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쓰게 해서 그것을 딸의 의학박사 논문으로 둔갑시켰다든지 하는 개인적인 비리들까지 거론되었다. 그리고 당 과학교육부 부장이었던 허석선은 “과도기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나오도록 방치했으며, 교육 부문 사업을 지도하면서 당의 정책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며 제멋대로 집행하였다.”고 비판당했다. 또한 과학연구사업과 교수교양사업에서도 사대주의와 교조주의가 발로하고 있다면서 이의 척결과 주체확립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학자들이 당 정책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의 의도를 똑똑히 모르고 있으며 그들 속에서 우리 당의 사상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좋지 못한 현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효순은 대남사업과 관련해 이수근을 위장자수시켜 남한에 내려보낸 사건 등이 추궁되었으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박금철의 행동을 묵인 방조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당 비서 김도만을 비롯해 고혁, 김왈룡, 이송운, 허학송 등이 맡고 있던 사상, 문화 분야가 집중적으로 비판받았으며, 결국 이들은 전원회의 후 모두 숙청되었다. 사회주의 애국주의 교양과 관련해 “사회주의 애국주의 교양이 당의 방침을 왜곡해 향토주의를 고취하고 청산된 지주를 내세우고 퇴폐적인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부르조아 사상과 봉건유교사상을 퍼뜨려 놓았으며 지방주의를 부활시켰다.”고 비판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배경에는 김일성 이후 차기구도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사실상 2인자의 위치에 있던 김영주(김일성의 동생)에 대한 반발이 사건의 발단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는 달리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김일성의 차기 후계구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당 핵심부는 비밀리에 ‘김일성-김정일-다음세대’로 후계구도를 잡고 있었고 이 구상은 내부합의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 내에서조차 공론화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당시 김영주는 1959년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된 후 1966년 10월 제4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당 비서로 선출되었다. 김영주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까지 올라 조직문제를 완전 장악하면서 급부상했다. 당 내 공기가 김영주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가자 당 조직담당 부위원장이었던 박금철은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이에 박금철 등 갑산계는 일제시대 경력도 의심스러운 김영주를 후계자로 인정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1967년 3월부터 김영주를 비판하면서 박금철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세우려고까지 시도했다.
1967년 5월,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은 갑산계는 모두 해임되었다. 박금철과 이효순은 지방 농기계제작업소의 부지배인으로 쫓겨났고, 후에 노동자로 전락했다가 다시 특별교양소에 감금되었다. 또한 김도만과 박용국(국제부장), 허석선, 고혁, 하앙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등도 모두 숙청되었다. 그런데 이 숙청사건을 주동한 것이 김정일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이 이후 북한 사회의 권력관계를 예고하는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사건과 그 뒤처리, 그리고 유일사상체계 확립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 김정일은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4,5년 남짓한 기간에 사실상 후계자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한편 갑산계 숙청을 통해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작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1967년 5월 전원회의는 유일지도체계 확립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북한에서는 공개적으로 전체 사회구성원이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외에는 그 어떤 사상도 모르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도록 요구되었으며, “전 당에 유일한 사상체계를 더욱 튼튼히 확립시켜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갑산계 숙청 후 제16차 전원회의에서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10대 강령이 발표되어 전 당원이 10대 강령으로 생활하도록 요구받았다. 이와 함께 김일성의 이름 앞에는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천재적 전략가이시며 온 인류의 태양이시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탁월한 영도자이시며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과 같은 길다란 수식어가 붙어다니면서, 김일성을 절대화하는 개인숭배 작업이 가속화되었다. 1968년부터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실’을 ‘김일성동지 혁명력사연구실’이라고 개편했고, 김일성의 석고상을 제작해 모든 학습현장에 설치했으며 김일성 관련 혁명기념비를 전국 도처에 건립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과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등 일가 전체를 숭배하는 작업도 시작되었다. 이로써 북한 사회에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가 수립되었고, 나아가 ‘위대한 수령’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수령제 국가’로 탈바꿈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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