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미완의 개혁’에 요동친 ‘조선의 운명’ | |
조선왕조 번영 핵심은 ‘공론정치’ 다양한 논의제도 통해 민심 숙고 정조, 붕당폐해 고치려 공론 제약 사후 견제받지 않는 세도정치 득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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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형 기자 | |
정조를 개혁군주라고, 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한다. 역사소설이나 사극 등
대중문화 분야에서 이런 이미지는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정조시대에 고정된 눈을 떼고 앞뒤 역사를 살펴보면 어떨까. 개혁과
문예부흥으로 화려하게 빛났던 정조시대 바로 다음에 외척들이 국가권력을 사유화했던 세도정치가 등장했고 그로 인한 사회부조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 때문에 온갖 민란이 도미노처럼 일어났던 조선의 쇠락기가 있다. 현명한 군주라 일컬어지는 정조 이후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선의 흐름이 달라졌을까? 최근 <정조 사후 63년>을 쓴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박현모 박사는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정조의 개혁정치 안에 있다고 지목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조가 펼친 중앙집권적 개혁정치가 역설적으로 세도정치의 출현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왕조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국정사안을 결정할 때 어전회의·비변사회의·경연 등의 논의를 거쳐야 하며, 다양한 형식의 정치비평과 인사검증, 논핵이 가능했 다. 여기서 특히 핵심이 되는 것은 사간원·사헌부에 있는 ‘대간’(臺諫)이라는 중앙정부 속 언론기관과 성균관·향촌 등에서 만들어지는 재야언론의 존재였다. 송시열 때에 이르러 ‘네가 없어야 내가 있다’ 식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붕당정치 역시 처음에는 이런 공론정치의 발전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개혁이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공론정치가 형해화되었다는 것이다. 정조가 만든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왕대비 및 외척들이 꿰차고 자기 이익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 견제할 정치세력은 기반을 잃게 됐다. 그리고 이런 세도정치가 조선 패망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공론정치의 파행은 결국 통치체제의 붕괴로 이어져 끊임없는 민란을 불렀고, 현상 유지만을 바라는 세도정권은 중국에만 매달리는 외교를 펼쳐 쇄국의 길을 걷게 했다. 종합해서 보면 “정조 사후 63년은 ‘정치의 공백기이자 외교의 공백기’였고,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이었던 공론정치가 무너져가는 과정”이라는 풀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 결과론으로 ‘조선 후기의 쇠락이 정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박 박사의 말처럼 결국 “세도정치기의 잘못된 정치는 개혁이 꼭 필요한 시기에 지위와 권력을 사사롭게 이용하는 데 급급한 실권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백성의 뜻을 자신의 정치적 힘으로 삼고, 두터운 관료의 벽을 넘으려 했던 정조의 개혁정치는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야 하되, 공론정치란 새로운 관점으로 조선왕조 쇠락의 원인을 좀더 냉철하게 들여다보자는 제안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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