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1&articleId=56001
6학년 딸아이가 거실 탁자에 잡다한 책자를 펼쳐 놓고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필기 10초..
그리고 TV 10초..그리고 다시 필기 10초..소파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 한마디 했습니다.
"송이야 숙제는 방에 들어가서 해라. 다하고 편하게 나와서 TV 보면 좋지 않겠냐?"
딸아이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중요한 숙제 아니에요..그리고 좀 있다 비스트 나와요"
그리고 필기 10초..다시 TV 10초..필기 10초..다시 TV.....30초..비스트 나왔나 봅니다. 그런데
기껏 30초 정도 스치듯 인터뷰만 하고 끝났습니다. 이 30초를 보기 위해서 딸아이는 1시간 전부터
거실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한 시간째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딸아이의 외마디 비명이 들립니다. 딸아이에게 30초란 너무 아쉬운 감이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비명까지 지를 정도였나..하고 생각할쯤..
"아빠 아빠~~~~~~~~ 지금 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뭘 봐?" 저의 퉁명스런 대답에 딸아이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내 손에...내 손에..지금 내 손에 아무것도 없어요..분명히 연필이 쥐어져 있어야 하는데
TV 보고 다시 필기를 하려고 하는데 손에 아무것도 없어요"
딸아이는 탁자에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다 들춰보고 자리에서도 앉았다 일어났다는 몇 번 하고
탁자 밑도 둘러보고 뒤에 있는 저에게 의심의 눈초리도 보내면서 연필을 찾고 있었습니다.
"잘 찾아봐. 연필에 발이 달렸겠냐?"
하지만, 딸아이는 지금의 감쪽같은 상황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멍하니 손 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빠..난 절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어요..필기하다가 잠깐 TV를 보고 다시 필기를
하려던 찰나....제 손에 있던 연필이 정말로 정말로 감쪽같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에요"
같은 말을 반복하던 딸아이는 턱을 괴고 자세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빠..아빠 집요정이라도 들어봤어요?" 진지하게 묻는 딸아이의 시선을 피하며 전 대답했습니다.
"혹시 음......지금 안방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 그분?"
"그분은 엄마고..."
딸아이와 저는 서로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요 집요정이 있데요...갑자기 물건이 없어지거나..분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물건이 없다거나 하면 그 집에 집요정이 산다는 거래요. 우리 집에도 집요정이 있나 봐요"
[이쁘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뭇 진지한 딸아이에게 농담을 건넬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딸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 눈에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긴 머리를 틀어올려 흔히 말하는 똥머리를 하고 있는 딸아이 뒷머리에 비녀처럼 꽂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집요정이 숨겼다는 연필이 딸아이 머리에 다소곳이 쪽져 있었습니다. 넉 놓고 비스트를
보다가 무의식중에 뒷머리에 꽂았나 봅니다.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고 참았습니다. 딸아이가 진지하게 말하는 집요정에 대해서
더 듣고 싶었습니다.
"아빠...곰곰이 다시 생각해 봤는데...분명히 우리 집에는 집요정이 있어...저번에 할머니가
냄비를 잃어버리셨데...분명히 집에 있는 냄비가 도대체 어딜 갔냐며 집을 온통 다 뒤져 봤는데
아직까지 못 찾으셨거든."
[엄마가 저번에 계란 삶다가 냄비 태워 먹어서 몰래 버렸다. 그때 아빠는 집에서도 맥반석 계란을
해 먹을 수 있다는걸 첨 알았단다] 속으로만 읊었습니다.
"그리고 오빠 닌텐도 그것도 그래....지금까지도 못 찾고 있잖아..오빠가 절대 밖에 가지고
나간 적이 없는데 분명히 집에서 잃어버린 건데...벌써 몇 년째 같은데.."
[엄마가 벌써 3년 전에 친척 동생 줬어..얼마 전에 그 동생이 그 닌텐도 들고 왔는데 너희 못 알아보두만]
그 이후에도 딸아이는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며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화장실
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습니다. 딸아이가 씻으러 들어갔다가 연필을 발견했나 봅니다.
딸아이 뻘쭘할까봐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ㅎ
늦은 밤 면봉을 찾으러 방안으로 들어갔더니 초저녁부터 널부러져 자고 있는 우리 집 집요정을 살짝
깨웠습니다.
"면봉 어딨냐?"
잠결에 뒤척이며 손짓하는 방향에 화장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찾아도 안 보입니다.
"없어 면봉 어딨냐고?"
집요정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립니다.
"두 번째 서랍에 있잖아~~"
두 번째 서랍에 들어 있는 면봉을 찾아들고 들릴 듯 말 듯 말했습니다.
"보이는데다 놔둬야지 이런 데 숨겨놓으면 보이냐..."
어느새 등 뒤에 다가온 집요정의 낮은 음성이 들립니다.
"15년 전 결혼할 때 사온 화장대에 15년 동안 두 번째 서랍에 항상 면봉이 있었고 그 옆에 당신이
항상 찾아다니는 손톱깎이가 15년 동안 있었거든요...어떻게 15년 동안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걸
한결같이 찾냐?"
냄비도 그렇고 닌텐도도 그렇고 면봉도 그렇고 확실히 아내가 우리 집 집요정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잠자리에 들며 한마디를 합니다.
"한 번만 더 면봉 물어보면.................... 죽여버린다."
우리 집 요정은.................. 입이 참 걸다. ㅎ